작성일 : 23-01-07 20:41
[N.Learning] 러브레터 다시 보기
 글쓴이 : Administra…
조회 : 1,774  

기억 속에서 소환된 천국
러브 레터(Love Letter)
지금까지 한국에서만 여섯 번이나 재개봉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Love Letter)를 다시 봤다. 평일임에도 상당한 관객이 있었다. 연령대도 다양했다. 이 영화가 세대를 초월해가며 남긴 존재감을 실감했다.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듯이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중학교 같은 반 동명이인 여자 후지이 이츠키를 짝사랑하는 내용이다. 남자 후지이 이츠키는 내향적 성향이어서 여자 후지이 이츠키를 사랑하고 있으나 결국 전학갈 때까지 제대로 고백도 못한다. 대신 여자 후지이 이츠키 만날 때마다 놀리고 괴롭힌다. 사랑이 서툰 사람들이 사랑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서로 괴롭히는 것과 같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도 남자 후지이 이츠키에 대한 연정이 있으나 이쪽도 미숙해 사랑으로 전개시키지 못한다.
첫 사랑이었던 여자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고 있던 남자 후지이 이츠키는 전학가서 살던 홋카이도의 한 마을에서 첫사랑 후지이 이츠키를 빼닮은 히로코를 만나자 첫 만남에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학 오기전 후지이 이츠키에게 고백하지 못한 첫 사랑에 대한 투사였다.
영화에서 남자 후지이 이츠키는 홋카이도의 설산을 등반하다 조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후지이 이츠키를 잊지 못하는 히로코가 홋카이도 설산에 와서 "오켕끼데스까(잘 지내시고 있나요)?"라고 소리쳐 묻는 대사가 불후의 명대사가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새로운 연인 히로코가 조난사고로 세상을 뜬 후지이 이츠키를 그리워해가며 우연히 옛 주소로 보낸 편지가 답장되는 것을 계기로 전개된다. 이 편지왕래로 동명이인의 여자 후지이 이츠키가 소환된다. 이 여성 동명이인이 학교 생활 중에 경험한 이츠키의 기억을 소환해내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히로코는 이 기억의 소환과정에서 이츠키가 자신에게 고백한 사랑은 결국 첫 사랑 여자 후지이 이츠키를 못 잊어서 한 사랑 고백임을 알게된다.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며 새롭게 찾아낸 사실이 있다. 남자 이츠키의 첫 사랑 여성 이츠키, 실제 연인이었던 히로코, 이츠키의 중학교 친구들, 중학교 때 선생님, 대학교 친구들,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두 이츠키를 그리워해가며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소환하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다. 이츠키가 죽기 직전에 불렀던 노래도 소환하고 내성적이었짐만 이츠키의 장난끼도 소환해낸다.
과거의 기억에 대한 소환은 영화에서 남자 이츠키가 자신 중학교에서 빌렸다가 이사가는 날 반납한 책 프로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도 묘사된다. 남자 이츠키는 이사가기 전 여자 이츠키를 찾아와 자기 대신 이 책을 반납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책은 프로스트가 사촌의 남편이었던 베르그송의 시간에 대한 강의를 듣고 영감을 받아서 쓴 책이다. 베르크송은 알다시피 체험된 시간에 관한 철학자이다. 베르그송은 물리적 시간은 그냥 빈배가 떠다니듯 단순한 흐름일 뿐이고 이 흐름에 삶의 주체로서의 체험이 채워질 때만 실제하는 시간으로 전환된다고 본다. 체험된 시간만이 기억으로 남아 자신을 구성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육체를 빼면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기억 덩어리다. 베르그송에게 죽는다는 것은 육신의 옷을 벗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남기는 것을 뜻한다. 베르그송에게 인간이 시간을 주체적 체험으로 채워 고유한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지 못한다면 자신이 이 세상을 다녀간 증거가 사라진 것이다. 베르그송에게 죽음이란 유산으로 남겨질 기억을 정산하는 의례다.
베르그송에게 천국이란 우리가 죽은 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소환된 기억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죽어서 육신이 사라진 장본인을 잊지 못하고 본인에 대한 기억을 소환할 때마다 미소짖는다면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기억으로 천국을 선물한 것이다.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면 지옥을 선물한 셈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있는 기억을 선사했다면 장본인도 결국 천국에 살고 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천국을 종교에서는 사후세계로 해석하지만 실제 천국과 지옥은 이승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기억을 통해 소환한 체험의 문제이다. 사후세계를 넘어 우리가 실제 경험하는 천국은 지금 현재에 소환된 어떤 사람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부활한다.
작고하신 어떤 분이 남긴 기억이 내 머리 속에 천국같은 행복한 추억으로 남겨져 있다면 이분을 기억할 때마다 내 현재의 삶 속에서 천국이 부활한다. 이분에 대해 소환된 좋은 추억이 지금을 살고 있는 나에게 천국의 행복한 체험을 선사한 것이다. 작고한 어떤 분에 대한 좋지 않은 악연이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 이분에 대한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이분은 나에게 지옥을 부활시킨다. 우리가 체험하는 천국과 지옥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남겨준 기억이 소환되어 현재를 통해 다시 체험된 것이다.
프로스트와 베르그송에 따르면 내향적 이츠키는 자신의 첫 사랑과 친구들에게 천국을 선사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일까? 나의 삶이 나의 사후에 사람들에게 천국의 추억으로 소환되어 이들을 미소짖게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억일까? 나의 삶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천국을 소환하는 기억으로 남기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달리 생각하고 어떤 다른 행동을 해야할까?
오늘도 나에게 천국을 선사하시고 떠나신 분들의 면면이 생생하다. 천국에 계신 이분들에게 묻는다.
"오켕끼데스까(잘 지내시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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