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26 08:25
[N.Learning]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다 바울의 각성사건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217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다
바울의 각성사건
바울의 회심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근원적 변화 사건 중 하나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들이던 일에 열심이던 바리새인이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강한 빛과 함께 쓰러지면서 예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 때부터 바울의 삶은 180도 바뀐다. 각성사건으로 개심하기 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예수의 말씀에 사울은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고, 예수는 사울이 핍박하는 예수라고 답한다. (행 9:3-9)
예수의 음성을 들은 사울은 빛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인도된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기도하며 회개하는 동안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 눈을 뜨게 되고, 세례를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scale)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행 9:18)
눈을 뜬 사울은 곧바로 다메섹 교회에서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한다. 이전에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 예수를 전파하니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다마섹을 떠나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는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개명한다. 바울로의 개명은 사울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온전한 새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상징한다.
본인은 졸저 <100년 기업의 변화경영>에서 조직개발의 창시자 Kurt Lewin의 변화이론을 현대적 맥락에 맞는 신변화이론(Neo Lewinian Model)으로 개정했다. 레빈의 변화이론은 삼 단계이론이다. 레빈은 변화를 완성하는 단계를 과거의 행동에 대한 탈학습(Unlearning) 단계, 새로운 행동에 대한 현재의 학습(Learning) 단계, 새로운 행동을 습관으로 굳히는 재 학습(Relearning) 단계를 완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육각형의 얼음을 더 멋있는 별표 모양의 얼음으로 변화 시키는 과정에 비유하면 얼음을 녹이는 것이 Unlearning이고, 별표 모양의 틀을 만들어 녹인 물을 여기에 따르는 것이 Learning이고 이 틀을 냉동실에 넣어 별표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Relearning이다.
레빈의 이론과 본인의 신레빈이론(Neo Lewinian Model)의 차이는 녹이는 대상이다. 레빈은 녹이는 대상을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신레빈이론에서는 녹여야 하는 대상을 행동의 암묵적 뿌리에 해당하는 정신모형이라고 생각한다. 신레빈이론은 행동은 아무리 새로운 행동을 위해 많은 개입을 해도 행동의 뿌리에 해당하는 가정을 담고 있는 정신모형이 변화하지 않으면 과거의 정신모형은 과거의 행동을 끊임없이 재생한다고 설명한다. 대부분 변화의 실패는 행동만 바꾸고 행동의 뿌리이고 가정인 정신모형의 실체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레빈이론에서 근원적 변화란, 과거의 행동을 지배하던 정신모형을 찾아 녹이고, 새로운 정신모형을 만들어 새로운 정신모형의 묘판에서 새로운 행동을 길러내고, 마지막으로 이 행동을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도록 정신모형을 제도화하는 작업으로 정의한다.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과정은 신레빈이론에 따르면 근원적 변화의 과정을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은 정신모형이라는 세상을 보는 색안경인 과거의 정신모형이 떨어져 나가 바뀌는 경험을 의미한다. 사울은 유대인 율법주의자 정신모형에 따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허황된 믿음을 퍼트리는 배교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색출하는 삶을 산다. 율법주의 유대인의 정신모형이 부활한 예수의 음성에 깨어지는 경험을 한다. 정신모형이 깨어지는 경험은 맨붕(Mental Collapse)다. 자신이 철석같이 믿었던 정신모형이 무너지는 맨붕에 처하면 하늘이 하예지고 아무런 행동도 못한다. 과거의 정신모형이 희미하게 세상을 보는 맹인 직전의 눈이었다면 맨붕은 완전한 맹인이 되는 경험이다.
사울이 예수님이라는 새 진리의 정신모형을 만나 빛에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다메섹으로 인도되는 경험이 사울이 직접 경험한 맨붕 경험이다. 사울이 실제 장인이 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신모형을 받아들이기 전에 혼돈의 세상을 경험했던 것을 정신모형이라는 개념을 모르던 사람들이 장님으로 묘사한 것이다. 사실 잘못된 정신모형이라도 작동되지 않는 맨붕의 상황은 장님보다 더 비참한 삶이다.
다마섹에서 과거의 정신모형이 무너진 맨붕으로 고통을 받는 동안 예수가 보낸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고 예수의 정신모형을 받아들인다. 신레빈이론에 따르면 아나니아의 세례는 사울이 과거의 정신모형을 탈학습하고 새로운 정신모형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각성사건이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정신모형을 진실로 믿고 이에 관련된 행동을 하여 새 사람 바울로 태어난 것이 변화의 완성이다.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새롭게 받아들인 예수의 정신모형을 전파하는 전도여행을 떠나 많은 난관 속에서도 새로운 정신모형에 따른 행동과 습관을 만들어 기독교의 터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다"**라는 표현은 바울이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로 살던 유대 율법주의자 정신모형의 삶의 감옥 속에 있었지만, 예수를 만난 후에 비로소 진리를 깨닫고 과거의 정신모형의 색안경을 벗고 새로운 정신모형에 기반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극화한 것이다. 눈의 비늘에 대한 비유는 성경에서도 인간은 정신모형이 변화하지 않으면 변화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신레빈이론의 가정을 설명하는 사례다.
바울이 시대는 한 번의 진리를 깨달으면 오랫동안 변화를 하지 않아도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초뷰카 시대는 바울이 살던 시대와는 달리 변화와 위기가 상수인 시대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서 살게 되면 과거에 깨달음을 주었던 정신모형은 변화한 시대에서 다시 비늘이 된다. 비늘로 변한 정신모형의 콩꺼풀을 다시 쓰게 되고 결국 이 비늘을 벗고 새로운 정신모형을 마련하지 못하면 또 다시 장님이 된다. 과거의 정신모형의 비늘을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화시킨 사람들만 깨달은 진리를 지킬 수 있는 안목을 갖는다.
변화 없이 진리를 깨달고 전하는 것이 중요했던 바울의 시대가 아닌 지금의 초뷰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진리를 깨달았어도 이 진리를 변화한 시대에 맞춰 증명해야 하는 고통을 부과 받는다. 세상에 대한 개입이 끝나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N번의 각성사건을 통해 변화한 세상에 맞춰 깨달은 진리가 진리였음을 소구해야 한다. 바울과 달리 우리는 세상에 바뀜에 따라 자신의 진리를 세상에 맞워 공진화 시키기 위해 정신모형이라는 비늘을 N차례 벗는 변태의 삶이 예정되어 있다. 초뷰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삶의 개입이 끝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장님됨과 장님됨을 극복을 반복하는 N번의 각성사건과 N번의 고난사건을 경험한다.
우리 주위에는 어느 한 시점에 예수가 전하는 진리를 깨달은 목회자가 세상을 환하게 보는 선지자급의 명성을 누리다가 변화한 세상에 맞춰 진리를 담고 있는 자신의 정신모형의 비늘을 벗어버리지 못해 비늘 속에 갇혀 다시 장님이 되는 삶으로 삶을 종결하는 비극을 비일비재하게 목격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통해 깨달아 얻은 처음의 진리를 세상의 변화에 맞춰 재해석하고 공진화하여 비늘을 벗겨내 새롭게 살려내지 못했다. 오래 전 깨달을 진리에 비늘에 비늘을 덧칠해가며 검은색 안경을 쓰고 스스로가 장님임을 숨기고 있다.
오래전 선조들이 처음으로 눈의 비늘을 벗고 목격한 진리를 기록해서 만든 66권의 성경을 지금도 글자 잣구 그대로 지켜내는데 사활을 거는 동안 교회는 점점 장님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이들은 자신이 장님되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장님 흉내를 내지 않는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해 차별과 편견을 휘두르고 있다. 눈의 비늘인 정신모형을 개혁하는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자신 눈 안에 들보(덕지 덕지 얽힌 비늘 덩어리)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찾아낸다.
한 차례의 비늘 벗겨짐으로 모든 진리를 깨달았다고 믿는 지적 자만심이 취한 순간 우리는 다시 맹인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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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기독교가 덕지덕지 비늘로 뭉쳐진 성경 속 진리를 제대로 찾아내기 위해서는 지식사회학과 헤르메뉴틱스(Hermeneutics)라고 부르는 해석학의 기법을 훈련해야 한다. 기독교에서는 해석학을 석의 (釋義)라고 번역한다. 지식 사회학은 모든 문화적 내용은 존재론적 근거에 뿌리를 두고 생성되기 때문에 문화적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맥락을 추적하는 학문이다. 헤르메뉴틱스는 존재론적 맥락의 비늘을 벗겨내고 그 속에 담긴 진실의 뜻을 찾아내는 방법론이다. 성경 66권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라기보다는 그 당시 구술과 그 당시 시대 상이라는 비늘을 벗겨내고 지금 이 시대의 진리의 의미를 찾아낼 때 진리로서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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