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12 11:51
[N.Learning]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의 경계 마음의 평정, 어떻게 얻나?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64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의 경계
마음의 평정, 어떻게 얻나?
근대철학의 아버지 칸트는 우리 인간이 마주하는 세상의 환경을 자연의 인과적 법칙이 지배하는 순수이성의 세상, 인과적 원칙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의지(Free Will/Autonomy)에 의해 지배되는 실천이성의 세상으로 나눴다. 칸트의 비문에도 써 있듯이 칸트가 평생 바친 철학과 과제는 자연과학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늘의 별과 마음 속에 떠 있는 존재목적인 도덕률의 관계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것이었다.
칸트는 이런 통합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자연의 인과적 철칙에 따라 움직이는 통제(Control)의 세상과 인간의 자율의지가 작용해서 만들어지는 자율(Autonomy)의 세상의 경계를 분명히 분별하는 것으로 삼았다. 인과적 자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원인을 찾아서 개입해야 바꿀 수 있지만 자율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세상에서의 변화는 삶의 존재 목적을 찾아 목적을 삶의 씨앗으로 종묘해 코즈(Cause)로 뿌리를 내리게 한 사람의 목적과 코즈를 찾아내야 한다.
내 맘대로 결정해서 집행할 수 있는 내면의 세상과 내 맘대로 결정해도 집행될 수 없는 외면 세상의 경계가 있음에도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혀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이 혼돈, 불안, 불확실성, 스트레스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 공포, 두려움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여행해가며 자신도 자율적 인간이니 모두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신화 때문이다. 이런 신화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험한 행위다. 이런 행위에 가담한 사람은 반드시 두려움, 불안, 공포, 스트레스로 다시 보복 당한다.
로고세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이 많은 동료들이 죽어나간 엄혹한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율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 영역 속에서 의미 있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용소의 상황이 아무리 엄혹해도 그 상황을 엄혹한 상황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닌지는 자신의 결정에 달린 문제다. 이 엄혹한 현실이 자신의 자율적 내면까지 침범해가며 객관적 현실로 인정하라고 강요하지만 이 현실을 자신의 내면의 주관적 현실로 인정할지의 문제는 온전하게 자신의 문제다. 세상이 아무리 강력하게 강요해도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신에게는 주관적 현실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이 특정한 태도를 보이거나 특정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해석하고 받아들인 주관적 현실에 기반한 것이다. 프랭클은 칸트가 규정한 이런 내면의 자율적 공간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엄혹한 현실이 이 자율적 공간을 침투하지 못하게 경계를 세웠다. 이 경계 속에서 안정감과 권능감과 통제감을 느껴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나섰다. 프랭클은 이런 내면의 자율적 통제 공간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 로고세라피를 창시했다.
프로이트는 이런 내면의 공간에서 통제를 잃은 사람들이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해 밖에 희생양을 정해놓고 이를 공격하는 현상을 투사라고 규정하고 연구했다.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화 내는 이유를 찾아보면 모두 자신의 내면 세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문제다.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혼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하기보다는 밖에서 희생양을 찾아서 화를 내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결국 화를 통제하지 못하고 투사하는 사람 주변에 있는 능력이 있는 친구와 동료는 모두 떨어져 나간다.
프랑크프르트 학파는 이런 내면의 경계가 허물어져 약해진 사람들이 모여 일으키는 집단적 광기에 대해서 연구했다. 나찌는 집단적 투사를 교묘하게 이용해 독일인들의 광기를 이끌었다. 세상과 자신과의 경계가 허물어져 자신에 대한 통제감을 잃은 사람들이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힘센 사람들에게는 과도하게 아부하고 의존하는 매조키즘의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과도하게 공격하는 새디스트의 이중구조를 보인다. 자신의 내면적 근력을 잃은 독일인들은 힘을 찾기 위해 히틀러를 우상화 시켜 자신들을 종속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표적으로 약한 범주였던 유대인들을 악마화 시켜 공격했다. 강한 사람에게는 매조키즘을 약한 사람들에게는 새디즘을 적용하는 집단적 이중구조가 파시즘의 광란을 만들었다.
독일 나찌 파시즘의 집단적 망령이 전광훈과 손영보를 따라 다시는 태극기 부대 기독교인에게 부활했다. 이들은 어느 순간 신을 잃어버리고 신이 주었던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보다 강한 사람(윤석열, 전광훈, 손영보)를 우상화 해가며 이들에게는 지독하게 굴종하기로 작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동성애자, 북한)에 대해서는 악마화 시키고 허수아비로 만들어 과격하게 공격하는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인다. 나찌 파시즘이 내면이 무너지고 허약한 사람들을 결집시켜 신권위주의 사이비 종교를 만들었듯이 전광훈과 손영보는 신을 잃은 사람들을 결집시켜 나찌 파시즘에 버금가는 사이비 광란을 일으키고 있다. 내면이 무너진 사람들이 내면을 회복하기보다는 외면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약한 사람들을 찾아 공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신권위주의 망령이 기독교라는 허울을 쓰고 대한민국에 부활한 셈이다.
이런 경계 문제를 리더십으로 해결한 사람이 성경 구약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다. 유대인들은 BC 606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유대인들이 삶에서의 신실함을 증명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받는 고레스 칙령이 BC 539년에 발표되고, 바벨론의 후원을 받아 유대인들이 예루살램의 성전을 복원하는 역사가 시작된다. BC 536년 스롭바벨에 의해 일차 성전재건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이방인들에 의해서 다시 무너지고, BC 458년 에스라가 귀국해서 다시 재건하나 결국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느헤미야이다.
느헤미야의 전략은 에스라나 스롭바벨과는 달랐다. 느헤미야는 성전이 제대로 복원되어 유지되기 위해서는 주변의 이방인들의 침공을 막아주는 경계가 필요하고 이 경계를 위해 성벽이 먼저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헤미야는 BC 444년에 귀국해서 52일만에 속전속결로 성벽을 먼저 재건했다. 성벽의 복원은 유대인들에게 성벽 안에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 안정감의 공간을 선사해주었다. 물리적 심리적 정신적 안정감이 생기자 자신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감이 생겼다. 통제감으로 불안을 극복하자 이들은 성전을 다시 복원하고 재건하는 일에 자연스럽게 참여했고 결국 이들이 노력으로 성전 복원과 유지 관리도 제대로 완성된다. 느헤미야는 후세의 리더들에게 성전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성전의 울타리를 먼저 복원해 심리적 안정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을 주었다
느헤미야의 성전복원을 통해 얻은 심리적 안정감, 통제감,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심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Ryan Deci는 자기결정이론의 통제감(Sense of control)이라는 개념으로 Amy Edmondson의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란 개념으로 연구를 제안했다. 실제로 이런 아이디어는 구글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로 실험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선구적 심리학자들도 이런 심리적 안정감, 심리적 통제감, 심리적 주인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토대가 제대로 설정된 울타리라는 것을 깨닫고 연결시켜 연구하지는 못하고 있다. 앞으로 후학들이 반드시 연구해야할 주제다.
프랭클의 내면의 경계, 느헤미야의 성벽과 같은 제대로 설정된 경계(울타리)가 이런 안정감과 통제감과 주인의식의 원천이다. 기업의 경우는 목에 칼이 들어가도 지켜야할 가치나 목적 중심의 Way가 건강한 경계다. 회사의 구성원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먼저 회사의 Way라는 울타리가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통제감, 안전감, 주인의식이 무너져 불안에 떨고 있는 직원들에게 경제적 보상이나 복지같은 사탕을 던져준다고 이런 없었던 심리적 안정감이 생겨 불안과 공포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발매된 <#급진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잉걸북스, 2024)>에도 변화를 완성하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전략으로 울타리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울타리 전략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것, 가진 것만 가지고 당장 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정하고 이 안에서 조용히 변화를 완성하고 완성의 결과물이 나오면 결과물을 지렛대로 삼아 경계를 조금씩 결국 목적에 대한 약속이 실현될 수 있는 지점까지 경계를 확장하는 전략이다.
번성하는 개인, 조직, 사회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없는 것의 경계인 울타리 개념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 울타리를 넘어서 과도하게 통제하려는 욕망을 자제한다. 경계를 넘어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불안과 공포와 스트레스의 원천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대신 숨 쉴 공간인 울타리를 만들고 이 울타리 안에서 자기의 마음, 정신, 몸의 근력을 세우는 작업을 통해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세운다.
이런 현명한 경계관리를 위해 급진적 거북이가 외치는 구호는 Let them과 Let me다. 울타리 밖의 지금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은 Let them을 외쳐가며 그들이 통제하도록 통제권을 넘겨주고, 대신 울타리 안의 자신의 실험공간에서는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Let me를 외쳐가며 통제권을 행사해 실제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세운다.
대힌민국은 전통적으로 <고요한 아침>이라는 심리적 정신적 상태를 자산으로 여겨온 나라다. 울타리를 잃고 통제감을 상실한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권능을 찾기보다는 밖으로 헤매며 자신이 복종할 권력을 찾아 헤매는 아수라장이 지금의 시끄러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을 이끌 차세대 리더는 무너진 울타리를 복원해 나팔, 피리소리, 꽹과리 소리가 사라지고 국민들 마음에 고요한 평화를 선사할 수 있는 사람이 선출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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