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자신의 온몸을 문신으로 가득 채웠을 것이다. 왜일까? 내자신이 남과 같거나 다르다는 것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정체성에 대한 불안 때문에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지 못할 때 느끼는 불안의 정도는 다음과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치매의 전조 증상으로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가물가물한 현상이 생겼다. 이런 환자가 경험하는 극단적 불안을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고 살 때 똑같이 경험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나라에서 몸에 문신하는 사람을 사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어서 집행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면 아마 사람들은 옷을 벗고 다닌다는 수치심보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정체성을 소비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옷을 넘어서 삼성의 갤럭시와 애플의 아이폰 중 하나를 선택하는 옵션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아이폰을 선택하고 누가 갤럭시를 선택할까? 다른 조건이 같다면 아마도 자신이 혁신적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아이폰을 기능적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갤럭시를 선택할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통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육도 마찬가지다. 결국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라면을 하나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 생각없이 소비하는 것 같아도 은연 중 어떤 라면이 내몸에 맞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서 정체성과 부합한 라면을 먹는 것이다.
모든 제품과 서비스가 결국은 정체성을 파는 행위라면 어떤 정체성을 파는 회사가 대박을 칠 수 있을까? 당연히 회사가 나쁜 회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우선적으로 망할 것이다. 품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내 얼굴에 나는 나쁜 놈이라는 이름표를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얼굴에 침뱉는 꼴이다.
답은 사람들이 언제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지를 알면 보인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바로 그거야 그렇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거야 하고 외칠 수 있는 유레카의 순간에 극단적 행복감을 느낀다. 서비스나 제품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잊고 있던 정체성을 찾아주는 제품이나 서비스가 가장 큰 행복을 주는 제품인 것이다.
21세기는 이처럼 고객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견하는 기쁨을 줄 수 있는 서비스나 제품을 팔 수 있는 회사가 초일류 회사로 등극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 성숙되면 우리 대부분의 생활은 인공지능이 제안하는대로 살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주권을 빼앗기게 된다. 모든 사람이 치매환자로 변하하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 상실의 시대에 최고의 회사는 자신의 제폼과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 유레카의 기쁨을 전달해주는 회사가 장악하게 된다. 일류를 지향하고 있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