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15 15:57
[N.Learning] 인문학이 정말 도움이 될까?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2,028  
   http://v.media.daum.net/v/20160307030814366?f=m [2441]

인문학이 삶에 정말 도움이 될까?
마약일수도 있다.

문사철의 인문학이 중요하기는 해도 현재처럼 CEO들의 교양강좌나 대단위 방송강좌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

인문학은 삶의 know why를 가르쳐주는 학문인데 이 know why는 깨달음이 삶에 내재화되어 자신의 살과 뼈가 되어 있을 때에만 작동한다. 금방 배운 인문학적 통찰을 자신의 자소서에 녹여 취업에 성공할 수 있어도 이 사람이 회사의 리더로 성장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아침마다 조찬모임에서 인문학적 지식을 통달한 CEO도 자신이 배운 인문학을 경영에 접목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조찬모임에 많이 참가해 교양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경영은 다른 방식으로 해서 구성원들에게 냉소주의를 심어주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평소 인문학적으로 말하던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문학이 삶을 분절시키는 것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 신앙적 지식은 늘어났어도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의 삶으로 전락하는 과정과 똑 같다. 자신의 삶에 변화을 일으키지 못하는 인문학은 교양을 위한 교양일 뿐이지 진정한 인문학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분절되는 아픔을 감내하기 위한 마약일수도 있다. 위안을 받기 위해 자신만의 종교를 찾아 헤메는 것과 같다.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인문학을 만들기 위해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인문학적 know why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 깨달음을 know how에 배태시켜 새로운 가치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인문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인문학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인문학적으로 아는 것과 인문학적으로 사는 것은 천지차이다. 지행격차가 극복되지 못한다면 인문학 공부는 시간낭비일 뿐이다. 인문학적 지행격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수업을 듣고 배우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배운 것을 자신의 삶의 스토리로 해석하고 해석한 것을 자신의 삶의 스크립트로 쓰고 이 스크립트를 자신의 삶에서 규레이션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간의 고통에 위안을 주는 신종마약일 뿐이다. 자기개발서가 Know How로 마약을 만들었다면 인문학은 Know Why 수준의 중독을 가져올 뿐이다. 마음이 허전해지면 다시 인문학 수업을 찾아 들으러 가지만 삶의 변화는 없다.

둘째는 사회과학과의 협업이다.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문학적 깨달음을 자신 삶에 대한 스크립으로 만드는 것이다. 즉 자신 삶의 대본인 Text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Text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이 Text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으로 존재하는 다른 사람들의 Text를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무리 뛰어난 대본을 만들었어도 자신의 악처부인을 설득시키는 것이 항상 최고의 장애였다. 내 Text에 영향을 주고 받는 이들과 Text에 대한 협상을 통해 서로가 동의하는 더 높은 차원의 Con-Text (맥락)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Text는 실현되지 못하고 고사당할 개연성이 높다. 씨앗으로만 존재하고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아무리 뛰어난 Text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우물안의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인문학은 결국 고사당한다. Context를 만드는 학문은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과의 협업은 인문학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최고의 상태는 자신만의 뛰어난 Text를 만들고 이것을 성공적으로 규레이션 해서 다른 사람들 마음 속에 이 Text를 심어서 다른 사람들도 이 Text를 자신의 text로 생각해 결국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context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때일 것이다. 이런 context를 만드는 것은 농부가 자신의 씨앗을 뿌려서 풍성한 곡식을 가꾸는 과정과 닮았다. 이런 과정은 브로도저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의 밭을 깔아뭉게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의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인문학에 다른 사람에 대한 긍휼감 compassion이 빠져 있다면 인문학은 현학적 자기과시 학문일 뿐이다.

최소한 자신에 삶에 대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인문학을 공부는 했어도 인문적 삶을 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해 강좌를 듣는 것을 넘어서 인문학을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실험하는 자기만의 인문학 실험실이 필요하다. 실험실에서 자신의 것으로 가공되지 못한 인문학은 자신의 고통에 위안을 주지만 잘못하면 신종마약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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