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은 내 욕망을 기관없는 몸체로 작동시켜 얼굴의 흰피부에 표정으로 파장을 보내고 눈코입을 통해 내 주체적 의지를 그려낸다. 내 살아 있는 표정과 주체적 의지가 씨줄과 날줄로 공명을 일으키면 다른 사람들의 얼굴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얼굴은 누구에게나 변화가 시작되기도하고 끝나기도 하는 치열한 전선이다.
문제는 내 얼굴에 그려낸 내 얼굴의 풍광은 전부 내 작품일수가 없다. 미에 대한 외적 열망에 쫓겨 성형한 얼굴일수도, 사회가 가르쳐준 모범생 얼굴일수도, 자신의 직업이 강요한 얼굴이기도하다. 혹은 의무에 찌든 부모의 얼굴일수도 마약과 쾌락에 몽롱해진 얼굴이 되기도한다. 내 얼굴에 표현된 그림은 내 순수한 욕망는 관계없이 내 정념이 탈주해서 표현된 얼굴일수도 아니면 사회가 나에게 강제한 표정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생얼굴을 감추기 위한 화장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런 얼굴들은 자연스럽게 표정이 살아 숨쉬는 얼굴의 풍광은 아니다.
내 얼굴성의 상당 부분은 부모의 유기체적 DNA를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준수한 외모를 가진 부모를 둔 덕택에 준수한 얼굴을 복권으로 타서 얼굴만 가지고 평생을 먹고 산다. 어떤 사람은 키 큰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복권에 당첨되어 키 걱정하지 않고 살지만 이에 반하는 불운한 사람들도 있다. 키는 얼굴이 아니라 몸이지만 결국 몸에서 탈주해 내 얼굴에 기표로 반영된다. 키 큰 사람의 잘 생긴 외모와 키 작은 사람의 잘 생긴 외모는 급이 다르다. 우리 신체의 모든 부분은 결국 얼굴이라는 표면에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 몸에서 탈주해서 얼굴성에 풍광으로 반영된다.
인생을 30년 단위로 나누면 우리는 세 꼭지의 인생을 살 수 있다고 가정한다. 적어도 첫 30년의 내 얼굴성은 부모가 물려준 얼굴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기이고, 두번째 꼭지의 얼굴성은 불혹(40살), 지천명(50살), 이순(60살)을 거쳐가며 자신만의 주체성을 반영하여 자신이 자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부모의 얼굴에서 탈출해서 내가 그려낸 얼굴성은 세번째 꼭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세번째 꼭지가 시작될 쯤 되면 젊었을 때 부모가 물려준 복권이었던 수려한 얼굴의 유효시효도 소멸한다. 이때까지 복권에 의지해서 사는 삶에 빠져 자신의 얼굴에 대한 제대로된 풍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결국 얼굴성의 잔고가 텅 빈 빈털털이가 된다. 과거를 잊지 못해 갖은 성형으로 얼굴을 복원해보지만 얼굴에 더 추한 풍광만 남길 뿐이다. 유전자 복권에 정복당해 살다가 자신의 얼굴조차 그려보지 본한 삶으로 종결하는 것이다.
인생 삼막 중 마지막 꼭지에 이르러서야 표현되는 제대로 된 얼굴의 풍광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자신의 정념을 이기지 못한 얼굴일까? 권력에 찌든 얼굴일까? 세상에 강요한 모습을 너무 충실하게 지키다 그 풍광으로 화석화된 얼굴일까?
우리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들뢰즈 클럽의 도반들이 동의하는 진실된 얼굴의 풍광은 목적을 기반으로 자신의 자아실현을 타아실현 접속해 내려는 욕구가 에너지로 전환되고 이것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표현된 표정이 살아 있는 편안한 생 얼굴이다. 표정이 자연스럽게 살아 숨쉬는 얼굴이다.
이 표정이 살아 있는 편안한 생 얼굴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과 접속되어 공명을 일으키고 이 공명을 통해 얼굴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좋은 변화와 생성을 선물한다.
자연스러운 욕망이 의지로 분출되어 살아서 숨쉬는 자연스러운 생 얼굴 풍광은 사회적 공명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런 공명성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회사의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회사에 들어갈 때 집에서 가지고 온 풍광을 문밖에 걸어놓고 회사에 맞는 표정으로 풍광을 바꾸고 들어간다. 집에서 가지고 온 나쁜 정념이 얼굴로 표출되어 구성원들에게 전염이라도 된다면 자신의 얼굴성 때문에 직원들의 생산성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들뢰즈는 얼굴의 권위성도 문제로 제기한다. 예를 들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는 우리 아이는 내 얼굴성에 지나치게 종속된 삶을 산다. 권위성 때문에 내게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나와 가장 가까운 옆님에게 묻는다. "아빠 요즈음 무슨 문제 있어?" "요 몇 일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한 번도 안 웃었어." 내 얼굴에 표현된 권위적 모습에 위압되어 초래된 일이다. 얼굴 튼 가족이라고 내 속에 분출되고 있는 정념과 잘못된 의도를 제어하지 못해서 생긴 대참사다.
소크라테스 클럽에 참여하는 도반들이 합의하고 있듯이 내 존재우위를 달성하려는 목적에 대한 욕망이 연기하고 연출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내 얼굴 풍광으로 표현되는 살아 있는 표정은 몇 살이 되어야 만들어질 수 있을까? 정신차려가며 얼굴의 스위치 되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은 언제가 가능할까?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도반들과 들뢰즈의 천의 고원 7장에 나타난 얼굴성을 읽어가며 새로 생긴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