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4-23 08:00
[N.Learning] 공정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잃다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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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정의에 믿음을 잃다
세월호 8 주기 단상
태어나서 좋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해서 존경받는 전문가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조건은 남들이 갖지 못한 탁월한 재능이나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우수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야 한다. 둘째는 이 재능과 머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은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 재능과 머리를 훈련시켜 가치 있는 전문성(의사, 변호사, 판사, 교수, 경영인, 화가, 음악가, 엔지니어)으로 만들어내는 개인의 노력이다.
이 세 조건 중 마지막 조건을 제외한 앞의 두 조건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에 의해 생득적으로 부여되는 조건이다. 재능과 머리를 물려주는 것도 부모이고 이런 재능을 훈련시킬 수 있는 재력의 부모를 만나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신이 특정한 사람을 위해 복권을 뽑아 준 것이다. 재능이 있는 부모와 재력이 되는 부모를 만난 것은 신이 뽑아 준 두 번의 복권에 동시에 당첨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이렇게 행운을 누린 사람들이 자신의 행운을 모두 자신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신이 얻어낸 모든 것을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때 공의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공의(righteousness)란 복권 당첨자들이 신이 자신을 위해 대신 뽑아준 엄청난 행운의 복권을 타게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각성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공의란 이들이 각성을 넘어 과도한 행운의 일부를 이 복권에서 배제된 불운한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기여로 특별한 재능도 없고 재능을 보완할만한 재력도 없는 부모 밑에 태어난 불운한 사람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가며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더 높은 곳에 더 평평한 운동장이 만들어지도록 돕는 것이 공의의 본질이다.
공의(righteousness)가 기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아무리 외쳐도 정의(justice)는 작동하지 않는다. 공의가 정의를 담는 항아리의 밑둥이고 이 밑둥이 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공의가 작동되지 않는 사회에서 아무리 기회를 평등하게, 과정을 투명하게, 결과를 정의롭게 소리 높여도 다 공염불에 불과하다. 정의(Justice; 혹은 공정성)는 결과가 현현된 미시적 사건이고 이 미시적 사건은 다 큰 거시적 공의(Righteousness)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정의가 열매라면 공의는 열매를 맺게 하는 튼튼한 나무이고 이 나무의 뿌리다.
국민들이 정의를 내거는 정치가들과 판사 검사들을 못 믿는 이유는 이들이 겉으로는 공의의 옹호자처럼 나서지만 실제로는 불행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더 평평한 운동장을 만들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내놓기는커녕 타고난 행운을 이용해 자신과 자신의 자식들을 위해 더 많이 챙기는 행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는 토대인 공의가 거짓 공의였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외친 정의가 허구가 된 것이다. 나라에 지금처럼 부정부패가 창궐한다는 것은 신이 뽑아준 복권에 당첨되어 삶을 넘치게 향유하던 사람들에게 공의가 사라진 것이다. 자신이 복권당첨자라는 것을 부인해가며 불운을 타고난 약자에게 눈에 띄지 않는 도둑질과 약탈을 자행하는 것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는 정의의 심판을 위임받았던 판검사가 퇴직후 전관예우를 챙기는 도둑질에 나서고 있다. 재직중에도 정의라는 명분으로 공의가 무너진 수사와 판결을 일삼았음 고백한 것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꼴이다. 이런 판검사들이 다시 정치가로 변신하는 세상에 사법정의가 실현될리 없다.
세월호가 정권교체의 계기를 만든 것도 기존 정권에서 행운을 타고난 기득 정치인들이 불운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더 큰 불운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냉담을 넘어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충격적 장면들 때문이었다. 국민들은 약자에 대한 최소한의 긍휼도 없는 정치꾼들에게 일말의 공의도 기대할 수 없었다. 공의를 잃은 정치꾼들에게 정의를 기대하는 것이 허구라는 것을 각성하고 사람들이 연합해 정권을 바꾼 것이다.
아직도 세월호로 수장된 젊은이들은 남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제 그만 이야기하라고 항변하는 정치가가 있다면 이들의 마음 속에는 공의가 사라진 것이다. 이들 마음에는 처음부터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한 긍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마음은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해 놓고 공정사회를 외쳤던 전두환씨의 냉동된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 마음은 세월호를 처음 목격했을 때나 지금이나 항상 눈 내리는 겨울이다.
세월호 8주기를 즈음해 지금 결과의 수준에서의 정의와 공정성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우리 사회의 엘리트와 전문가로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 공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선동 정치가들이 주장하는대로 결과의 수준에서 문제로 불거지는 정의의 문제는 정의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공의가 무너졌을 때 눈 앞에 얼쩡거리는 정의나 공정성에 분풀이를 하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것이다. 정의의 뿌리인 공의의 회복만이 정의가 제도적으로 뿌리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세월호 침몰은 대한민국이 정말 공정한 미래를 원한다면 정의를 외치기 전에 복권당첨자들이 잃어버린 공의를 먼저 복원하라는 절대명령이다. 세월호로 수장된 소년 소녀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가들이 있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는 공염불일 뿐이다.
세월호 8주기를 추모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PS: 생존했던 소년 소녀들도 지금은 청년이 되었을텐데 그 큰 트라우마와 고통을 잘 견디고 이겨내고 있는지도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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