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26 06:44
[N.Learning] 내 삶은 글쓰기가 되고 있나? 들뢰즈의 얼굴성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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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글쓰기가 되고 있나?
들뢰즈의 얼굴성
진성리더십 아카데미 도반들과 <소크라테스 클럽>에서 들뢰즈의 천의 고원을 읽고 있다. 천의 고원 7의 고원에 얼굴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들뢰즈에 의하면 얼굴은 내 내면의 생각들이나 느낌이 상연되는 하얀 스크린이다. 얼굴은 영화를 통해 세상과 생각의 의미(기의)를 주고 받는 장소로 기의를 코드화하여 얼굴에 표현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이 코드화한 의미를 탈코드화 시켜가며 의미를 파악하고 소통해간다. 어떤 사람들은 다혈질적이어서 자신이 개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지만 어떤 사람들은 포카 페이스를 만들어 자신의 의도가 백색의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게 하는 사람도 있다.
얼굴은 흰 스크린도 가지고 있지만 눈구멍이나 코구멍과 같은 검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검은 구멍은 주체화를 의미한다. 이런 검은 구멍이 없다면 사람들의 윤곽을 구별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문제는 이 주체화의 구멍이 개인적 정념으로 가득차 주체화의 함정으로 작용할 때이다. 주체화가 함정으로 작용할 때는 이 구멍으로 자신의 정념만을 숨겨놓고 있을 때이다.
인간에게 제대로된 정념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생산적 주체화는 글쓰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얼굴의 흰 스크린에 제대로 된 영화를 상연하기 위해서는 주체화의 대본이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 산다는 것의 본질은 자신의 대본을 쓰는 글쓰기에서 성패가 드러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얼굴의 흰스크린만을 이용해서 말과 표정으로만 사는 사람과 구멍의 주체성 함정을 극복해가며 제대로 된 대본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학자들처럼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라는 노트에 항상 삶의 스토리와 흔적으로 기록을 남긴다. 인류가 다른 동물들을 제치고 영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다 이 글쓰기 능력 때문이었다. 문자가 있었을리 만무한 원시인들도 자신의 삶의 스토리를 동굴벽화로 글쓰기 흔적을 남겼다. 이 동굴벽화를 보고 후세는 자신의 벽화를 만들어냈다. 이 작업은 문자가 발명될 때까지 가장 확실한 글쓰기 방법으로 존재했다.
원시인 상황을 재현해 문자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글쓰기에 몰입할까? 글에는 항상 주제가 담겨 있기 때문에 글쓰는 사람의 의도가 주제로 반영된다. 이 의도에 따라 삶을 살게 되면 상황 속에 스토리든 단순한 기록 형태든 텍스트가 생긴다. 상황이 노트이고 의도가 펜인 것이다. 내가 상황에 남긴 텍스트에 사람들이 반응하게 되면 이들은 내 텍스트를 기반으로 다시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해 결국 공동으로 쓴 Context가 만들어진다. Context 즉 맥락은 빈 노트에 불과한 상황에 여러 사람의 의도를 개입시켜 공동의 스토리 북을 만들어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이 맥락을 통해서만 만들어진다. 학자들의 글쓰기가 상아탑의 공론으로 끝나 변화를 유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맥락을 만들지 때문이다.
자신의 텍스트만 드러내는 정념의 글쓰기에 치중하는 사람은 얼굴의 검은 구멍의 주체성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다. 검은 구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Context를 만들어내는 글쓰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객관적 환경에 종속해서 살기도하지만 이 맥락이라는 글쓰기 활동을 통해 환경을 주체적으로 새롭게 구성해낸다. 이런 글쓰기 과정을 통해 문화가 만들어지고 화폐가 만들어지고 사회가 만들어지고 국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의 변화는 누군가가 자신의 간절한 의도를 담아 생산적 맥락(context)를 만들어내는 글쓰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자신만의 text가 울림을 창출해 context로 전환될 때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 진화되는 것이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도 글쓰기를 인정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환경결정론인 진화론에서는 인간만의 글쓰기 활동의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다. 복제가 잘못될 때 생긴 돌연변이가 인간 진화의 원인일 뿐이다. 복제의 실수가 변화의 물꼬가 된다는 은유도 의미 있지만 이 실수가 일어날 확율과 시간을 생각하면 진화론으로 인간의 변화와 혁신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가장 개연성이 있는 가설은 사람들의 글쓰기 활동을 통해 새롭게 창조된 맥락의 압력을 유전자 체계가 이기지 못하고 복제의 실수를 가속화 했는지도 모른다는 중간가설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내 삶의 궤적을 나를 넘어서 내 후대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다. 내가 세상에 족적을 남기는 유일한 방법은 내 상황에 내 텍스트를 스토리로 남기는 것이다. 이 스토리에 감화된 누가 내 텍스트를 Context로 만들어준다면 나는 세상에 유의미한 변화의 족적을 남기는 삶을 산 것이된다. 인문학의 한계점은 text를 만들어내는데 치중하는 과정에서 세상의 실질적 변화는 text가 아니라 context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결정적 사실을 놓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Context에 기반한 글쓰는 주체적 생동적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나는 오늘도 주체화라는 명목으로 정념의 글쓰기에 빠져 얼굴의 검은 구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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