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를 보낸 지 어연 80년이 흘렀다 여전히 길을 잃었다 어제(2025년 2월 16일)는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 서거 80주기다.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동간도의 척박한 땅이었지만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집단 이주해 건설되었다. 후에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이 합류하면서 '동방을 밝히는 곳(明東村)'이라는 뜻을 지닌 근동에서 가장 큰 한인촌(韓人村)을 형성했다. 윤동주는 주로 별을 노래했지만 별을 노래한 이유는 캄캄한 밤에 여행할 수 밖에 없는 시대의 이방인들에게 길을 밝히기 위함이다.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윤동주에게 더 중요한 시제는 <별>이 인도하는 <길>이다. ========== 서시 윤동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는 윤동주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나침반을 상징한다. 모든 나침반은 북극과 남극의 극성이 만든 자기장으로 작동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나침반의 북극성이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극성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나침반이 이끄는 대로 "나에게 주어진 존재 목적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 속으로 약조한다. 종종 삶에서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가정)에 괄호를 치고 탐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침반은 떨림을 멈추고 나는 내가 받아들이는 가정과 믿음이 만든 쳇 바퀴에 갇힌 포로가 된다. 포로가 되면 가정이 시키는 대로 편견과 차별을 휘두르며 살고 있음에도 세상에 부정성을 감염시키는 자신을 감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의 뒷담화가 늘어나고 결국 어느 순간 편견의 감옥에 갇혀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변화한 세상에 맞춰 나침반을 놓고 지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인 괄호치기(Bracketing)이라는 개념은 현상학을 만든 후서얼이 창안했다. 대수에서 모르는 사실이 발견되면 일단 X로 해놓고 X의 실체에 대해서 탐구하는 행위와 같다.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보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 괄호치기를 통해 자신이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가정을 검증해서 가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괄호치기를 이해하고 훈련한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삶과 세상과의 디커플링을 극복하고 통찰력이 있는 비전을 회복할 수 있다. 후서얼의 괄호치기는 누구나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에 괄호치기지만 사실 최고의 괄호치기는 삶의 종속변수에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가정과 믿음을 찾아서 괄호치고 질문을 던지는 메타인지력이다. 최상위 가정과 믿음에 괄호치기할 수 있는 메타인지 능력을 훈련한다면 누구나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다. 괄호치기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색안경으로 당연하게 내리는 평가나 판단을 중지시키는 작업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이 중지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는 모든 대상은 내 과거 경험의 색안경(가정/믿음)으로 채색된 대상이다. 내가 만든 편견의 감옥에 세상을 가둔 것이다. 괄호치기를 하지 않는 삶은 편견에 가득한 삶이다. 세상의 쳇 바퀴에 갇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이 변화했음에도 변화한 세상은 자신이 과거에 본 같은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이 바뀌어도 새로움을 전혀 못 느낀다. 괄호치기가 뛰어나면 누구나 뛰어난 지도술사이자 시인이 될 수 있다. 윤동주가 뛰어난 지도술사이자 시인인 것은 누구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해 괄호치기를 통해 대상을 초월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안목을 길렀기 때문이다. 특히 윤동주가 누구보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은 자신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집에서 뛰쳐나와 그간 하늘로 믿고 있던 집 천장에 괄호치고 집 밖 하늘에 별(존재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또한 생계와 쾌락에 찌들어 있는 자신을 괄호치고 더 깊이 들여다보니 자신은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는 자신도 긍휼로 사랑해야 하는 운명을 알아차린 것이다. 아픔조차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긍휼의 남극성과 존재목적의 북극성을 직조해 만든 나침반을 가지고 지도를 만들어가며 길을 찾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한 시가 서시다. 서시는 더 이상 괄호치기가 불가능한 <나침반>의 존재가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다. <새로운 길>이라는 윤동주의 시도 쳇 바퀴가 돌듯이 삶이 무료해질 때 어떻게 괄호치기를 해서 새로움을 다시 찾아내는 지를 묘사하고 있다. 윤동주는 <새로운 길>에서 괄호치기를 통해 찾아낸 오래된 새 길이 같은 길을 걸어도 길을 잃지 않은 자들에게는 온전한 길임을 역설하고 있다. ======== 새로운 길 윤동주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가 매일 걸었던 길은 같은 길이지만 바람이 바뀌고 아가씨가 등장하고 꽃이 피고 지는 매일 다른 서사를 가진 온전한 새 길이다. 괄호치기를 통해 발견한 길은 같은 길이 아니다. 새로운 길은 오래된 새길이다. 우리의 삶이란 오래된 새길을 찾아내는 과정임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나침반을 가진 윤동주도 가끔 괄호치기를 게을리 해서 길을 잃어 버리는 곤혹스러움도 고백하고 있다. 괄호치기가 중지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자기 삶에서 단절되어 길을 잃는다. 사람들이 괄호치기를 못해 길을 잃으면 분절적인 길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영광만을 노래하던지, 의미없는 현재 일에 자신을 중독시키든지, 아니면 미래의 희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윤동주의 <길>에서 저녁은 과거를 아침은 미래를 의미한다. 온전한 나침반을 길동무 삼아 어제의 길과 다가올 길에 대해 성공적 괄호치기를 통해 지금 걷고 있는 현재의 길에 과거와 미래가 온전하게 연결된 길이다. ========== 길 윤동주 -----------------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잃고 나는 담벼락 저쪽에서 불안을 못이겨 서성이고 있다. 나의 삶에서 과거 미래가 현재로 연결되어 있을 때만 온전한 길 위에 선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내 길이 어디에서 끊어졌는지 질문을 던진다. 길을 잃었을 때 윤동주가 던진 질문이 서시에 등장하는 나침반을 앞세운 정체성 질문이다. 자신은 정말 하늘을 보고도 부끄러움이 없는지 주변에 아파서 쓰려져 누워 있는 친구와 동료와 이웃을 긍휼로 사랑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정체성 질문이다. 괄호치기의 끝판 왕은 상황이 바뀔 때마다 지금까지의 태도를 판단중지하고 나침반을 내세워 목적과 긍휼에 관해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결국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침반이 던지는 정체성 질문이다. 이 정체성 질문에 답을 얻었을 때 던질 수 있는 심화 질문이 자기 정의 질문(self defining question)이다. 자기 정의 질문은 이런 과거 현재 미래의 맥락이 주어졌을 때 나는 어떤 역할과 책무를 수행하는 누구여야 하는 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가끔 길을 잃었을 때마다 길을 찾기 위해 자기 정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처럼 온 나라가 길을 잃었을 때도 온 국민이 촛불을 밝히고 길을 찾아 나서며 자기 정체성에 관한 자기 정의 질문을 던진다. 이게 대통령이냐? 이게 국회의원이냐? 이게 검사이고 판사냐? 이게 목회자냐? 이게 영부인이냐? 이게 해병대냐? 세상이 변화하면 우리가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상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모여 질문을 던지는 괄호치기를 위해 협업해야 한다. 얼마 전 인류가 처음으로 블랙홀을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과학자들 각자가 자신의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자신을 집단적으로 괄호치기하고 블랙홀을 볼 수 있는 가상 천체 망원경 구성에 성공한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나서서 길을 잃고 헤매는 대한민국에 대해 괄호치기하고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연결시키는 정체성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할 시점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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