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 중에 구별하지 않고 쓰는 용어가 책무(Accountability)와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용어다. 이 두 용어가 가지는 함의는 천지자이이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 두 용어에 대한 혼용이 결국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혼돈의 원인이다.
책임(responsibility)은 결과 지향적 과거 사고의 용어인 반면 책무(Accountability)는 원인에 기반한 미래 사고의 산물이다. 책임은 어떤 부정적 결과가 산출되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복리 신체 상의 침해를 입혔을 경우 이 결과에 대해 법적 경제적 책임을 물어 과거의 원 상태를 복원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책임은 새로운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복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또한 항상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이 문제되는 것은 책임을 지는 사람과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다르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일을 시킨 사람이 따로 있고 여기에 고용되어서 시킨대로 일한 사람이 다르다면 책임은 일한 사람이 지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사람이 져야 맞다. 하지만 책임과 역할이 분절된 세상에서는 대개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시킨대로 일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이 책임지는 쪽으로 기운다. 기업의 경우 오너가 시킨대로 역할을 수행한 임원들이 대신 책임을 지고 법정에 선다. 정치에서도 책임공방이 생기면 꼬리짜르기를 하는 것이 대표적 책임전가 수법이다. 권한과 의무가 분리된 책임 거버넌스 형태는 항상 힘이 없는 사람들이 대신 책임져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지는 정의에 대한 상식을 기대하기 힘들다.
권한과 역할에 대한 분리는 세상을 권모술수의 장으로 만든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재발방지를 약속하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는 다른 옷을 입고 다시 교묘하게 나타난다. 이런 책임공방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지 않는 두더지 게임에 진입하게 만든다.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의 진실에 대해서 모두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책임이 손상된 것을 복원하여 과거로 회귀하는 개념이라면 책무는 미래를 만드는 것과 관련한 개념이다. 또한 책무(Accountability)란 책임과 의무에 대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어떤 결과에 대해 법적 경제적 책임을 넘어 누가 정당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여기에서 설명이 안 될 경우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가능하도록 만들 것인지의 이 상식적 설명을 가능하게 함을 통해 어떻게 미래를 만들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책무에 대한 질문이다. 책무의 문제는 경제와 법적 원상복귀를 넘어 어떤 주체가 미래에 대해 약속을 했때 이 약속을 현실로 실현시키고 있는 지의 문제이다.
우리가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기대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쥐는 법적 경제적 책임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미래를 만드는 약속을 얼마나 실행했는지 즉 책무의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한 가족의 가장이 어린 가족구성원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책임의 문제이지만 생존을 넘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존재를 실현할 수 있게 터전을 만들어 이들을 제대로 독립시키는 것은 책무의 문제이다.
요즈음 모든 기업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CSR)도 기업이 잘못한 경제적 법적 책임을 넘어서 기업이 약속한 미래를 실현시키고 있는지 즉 이 약속을 통해 미래의 표준을 만들고 있는지의 문제로 본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무>로 용어를 수정하는 것이 맞다. 이런 용어성의 문제 때문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보다는 기업시민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기업들도 많다.
책무란 법적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서 어떤 주체가 자신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어떤 존재이유를 구현할 것인지에 대한 약속이 있는지의 문제다. 핵심은 자신의 삶에서는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고 살고 있는지, 언제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인지다.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이런 약속을 언약(Covenant)이라고 칭하고 이런 언약을 지키는 행동을 신자의 책무로 규정한다. 인간은 책임의 이행을 넘어 책무의 실행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업이든, 국가든, 종교든, 개인이든 자신이 어떤 존재이유를 구현하여 미래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목적에 대한 언약이 없다면 이 주체에게 책무를 요구한다는 것은 말장난이다. 책무성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약속을 실현시켜 미래를 선사하는 삶을 자신에 관한 진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책무성은 진실을 실현시킴을 통해 자유를 체험하는 것이다.
정치가들도 책무성을 복원한다면 이들의 약속이 지금처럼 항상 정치적 공언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책무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이 약속해서 전달하는 과일이 설익은 과일이나 섞은 과일을 포장만 멋지게 해서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진실을 숨기는 것으로 생각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기업도 책무성이 있는 기업들은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이 주체적 책무로 통합되어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미래의 약속인 기업의 사명과 목적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기업이 책무는 역시 말장난에 불과해진다. 회사의 구성원들이 고객과 사회에 대한 회사의 약속인 사명과 목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에서의 책무성을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들이 고객에게 약속해서 전달하는 과일이 썩은 과일이 아닌 제대로 익은 과일인 이유는 과일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약속한 목적을 이 과일 속에 실현시켜 고객에게 체험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기업에서 행해지는 목표경영 (MBO: Management by Objective)은 고객이 아니라 조직이 설정한 운영적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묻고 이것에 대한 평가와 보상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책임소재의 달성이 썩은 사과를 포장만 멋지게 해서 전달한 것인지는 고객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지만 물어볼 방법이 없다. 이에 비해 목적경영(MBP: Management by Purpose)은 고객에게 전달할 가치인 제대로 익은 사과를 전달했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목적경영이란 운영적 목표자체 달성을 넘어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할 이유를 실현시키는 것을 책무로 여긴다.
존경받는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열망하는 기업들이라면 책무 이전에 자신들이 세상에 한 약속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이런 약속에 대한 신뢰성이 없다면 사명에 대한 책무성에 의해서 미래를 만드는 기업은 아니다.
나는 내 삶의 존재이유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책무의 사람인가?
나는 이 책무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는 진실을 행하는가?
나는 이 책무를 이행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책임은 항상 다시 부가되는 어깨의 짐이라면 책무는 진정한 존재의 자유를 체험하게 하는 날개이다. 책임만 있고 책무가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