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화되가는 자유, 평등, 민주의 개념
초연결 디지털 플랫폼 사회
사회의 지평은 기술과 문화의 발달에 힘 입어 지속적으로 융기한다. 지평이 융기함에도 불구하고 융기된 지평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20세기에나 통용되는 자유, 평등, 민주를 주장한다는 것은 시대착오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가 융기된 지평을 이해하지 못하고 20세기의 자유, 평등, 민주를 주장한다면 온 국민을 융기된 지평 때문에 생긴 싱크홀에 가두는 형국이다.
조지 오웰의 <1984> 소설에 나오는 통제국가보다 더 고도의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통제와 감시의 국가가 시작된다. 국민들은 자신이 싱크홀 속 디지털 지하 감옥에 갇혀서 감시당하고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갇혀산다는 현실을 부인한다.
20세기에 주창되던 자유는 제약으로부터의 자유다. 제약이 경제적 제약일수도 있고, 신분적 제약일수도, 정치적, 제도적 제약일수도 있다.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더 높은 곳에 운동장을 세워 이런 제약으로부터 자유에 대한 체험을 제공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자유에 대한 선배들의 노력 때문에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우리도 더 이상 굶어죽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를 체험하고, 누구나 투표권을 행사하고 있고, 왕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선출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자유론의 저자 밀은 자동차 키가 발명되지 않았으면 여성들이 이동에 대한 자유를 얻지 못해 가정과 남성들로부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설명이다.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몰아서 시장이라는 이념적 세상 속으로 몰아넣고 무한경쟁하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사람과 기업을 동원한 것이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돈을 목적으로한 무한 경쟁에 대한 독려는 겨우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을 양극화라는 더 큰 감옥에 가두었다. 대한민국의 보수가 주창하는 자유는 아마도 시장에서의 무한경쟁 수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시대착오적 자유개념이다.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향해야 할 자유는 자신이 실현하고 싶었던 것을 실현하는 존재목적에 대한 자유이다. 존재목적에 대한 자유는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넘어서 존재목적을 "향한 자유"이다. 오랫동안 새장에서 성장한 새는 새장에서 풀어주어도 자유에 대한 이유를 각성하지 못하면 다시 새장으로 돌아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각성해서 이것을 실현해서 유산의 메모리를 남기고 지금까지 지구를 빌려쓴 댓가로 랜트비를 지급하고 세상을 떠나고 싶어한다. 세상이 높아진 기술적 지평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목적을 선택하고 이것을 실현시켜 유산을 남겨주는 책무를 완성했을 때 진정한 최고수준의 자유를 만끽한다. 유산에 대한 책무를 완성해서 훌훌털고 언제든지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자유다. 국가든, 기업이던 개인이던 존재목적을 실현해 지구를 빌려쓴 댓가로 빚을 청산할 수 있는 유산을 남기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은 새장에 갇힌 새이거나 풀려났지만 다시 새장으로 돌아가는 새일 뿐이다.
평등 개념도 진화하지 못하고 화석화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20세기의 평등은 제도적 평등에 고착되어 있다. 누구나 제도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누려야하며, 절차와 과정에서 이중잣대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되며, 결과는 공정하게 산정되어 분배되는 것을 평등의 모든 것으로 믿는다. 화석화된 평등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사회적 지평의 융기는 이런 제도적 평등의 상당부분을 개선해왔지만 이런 제도적 평등의 문제가 제도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모든 정부가 공정성을 위해 정책적 목숨을 걸겠다고 나섰지만 항상 되돌이표에 끝난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국가의 헌법이념에 명시되어 있는 평등은 독립된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을 권리이다. 독립된 온전한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신의 고유성에 대해서 소구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자신의 존재목적을 각성하고 이 존재목적을 달성해서 존재우위를 구현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이들간의 비교우위를 넘어 존재목적에 따른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 21세기 디지털 플랫폼 시대 평등의 이념이다. 개인이 존엄한 인간으로 각자가 가지는 존재우위를 상실했을 때 비교가 가능한 경쟁우위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 줄세우고, 비교하고, 카피하여 따라잡는 것에 목숨을 거는 무질서가 난무한다.
국가나, 기업이나, 개인이 모두가 자신의 목적을 각성하고 존재우위를 실현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경쟁우위를 추구한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공정성에 대한 이슈는 대부분 저절로 해결된다. 존재우위를 상실한 국가가 국민들에게 경쟁우위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강요할 때 이런 국가가 내세우는 공정과 정의는 공염불이된다. CEO 출신 대통령을 세웠을 때 국가의 공정성은 더 심각하게 무너지는 것을 우리도 경험했다. 공정성은 커녕 국가는 경쟁우위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패자부활전 치루듯 서로를 누르고 제압하는 진화론자들의 주장하는 적자생존의 동물세계로 퇴락했다.
민주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분노해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화석화된 20세기의 민주개념이다. 21세기 민주에 대한 개념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생업에서 고유한 존재목적을 각성하고 자신 삶의 주인공으로 일으켜 세워질 때 실현된다. 아침에 자신도 잠과 피곤에서 일으켜 세워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극적 활동과 개입이 전제되는 민주를 외친다는 것은 자가탕착이다.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각성때문에 어제도 피곤해서 잠에 들었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것을 다시 실현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들만 민주에 대한 주권을 되찾은 사람들이다. 민주에 대한 각성은 남이 돈을 주고 시켜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왜 일을 해야만 하는 존재목적을 가진 사람들만 체험한다. 이런 민초의 민주를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이 북적대는 새벽시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정치적 민주의 개념을 가장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다. 요순시대 임금님이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시찰할 때 백성들은 자신의 배를 두드려가면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鼓腹擊壤(고복격양)가를 부른다. 백성들은 임금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자신들이 자신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부분의 백성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 이유는 임금이 드러나지 않고 정치라는 플랫폼을 제대로 설계해서 깔아주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자신이 주인중 주인이라는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더 낮은 몸으로 이런 플랫폼의 운동장을 만들어서 백성들이 스스로 주인이 되도록 세웠기 때문에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가 달성된 것이다.
초심으로 국민의 마음을 읽겠다고 다짐하는 수준의 리더라면 20세기의 리더십을 반복하는 수준이다. 국민들이 자신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지도자가 먼저 국가의 존재목적을 세우고 이 존재목적에 따라 21세기 기술적 플랫폼의 운동장을 세울 수 있을 때 이 운동장에서 국민 개개인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민주를 제대로 체험한다. 노자가 꿈꿔왔던 민주세상이 21세기에도 구현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새벽시장의 분위기로 만들지 못한다면 민주는 싱크홀에서 화석화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경쟁우위가 모든 것을 결정해준다는 믿음을 넘어 경쟁우위가 반드시 나를 통해 실현되어야만 하는 이유인 존재목적을 세울 때 경쟁우위는 존재우위를 만들어낸다. 모든 사람들이 존재우위를 이끄는 미래 지향점을 각성할 때 21세기 초연결 디지털 플랫폼 지평에 맞는 민주, 평등, 자유를 구현하는 세상이 온다. 이런 일은 정치가들에게 맏겨야 할 이유가 없다. 성숙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이 서 있는 장면과 일터에서 경쟁우위를 존재우위로 연결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미숙한 정치가들도 세상의 지평이 달라져 있고 자신들이 싱크홀에 빠진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각성할 날이 올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패착은 20세기 진보이념을 고수하여 스스로가 만든 싱크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이 이야기하는 진보는 융기된 지평의 수준에서 보면 보수도 꼴통 보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의 지평이 이동했음을 보지 못하고 보수를 진보라고 주장하는 내노남불의 진영논리 싱크홀에 빠졌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공진화하는 역사인식에 대한 패착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 국힘당이 정권을 얻은 것은 민주당이 떨어트린 바통을 운좋게 주은 것이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어서 스스로 얻은(Earn)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운좋은 정치세력이었다는 겸허함을 잊는다면 반드시 바통을 다시 떨어트리는 운명에 처할 것이다.
나라의 미래 지평은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스파링 파트너로 생각하고 씨줄과 날줄로 엮어 시대를 직조해낼 수 있을 때에만 열린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민주당이든 국힘당이던 서로 스파링 파트너로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선배들이 어렵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전해준 자유, 민주, 평등을 화석화시켜 다시 바통을 떨어트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솟아오른 시대의 지평을 인지하지 못하고 국민들을 보이지 않는 디지털 싱크홀 감옥에 가두어가며 자유, 평등, 민주를 박탈하는 21세기 조지 오웰 국가로 만들지 않기를 기도한다. 정치가들이 솔선수범해 20세기에나 통용될 자유, 민주, 평등의 화석화된 개념을 벗어던지고 생업의 현장에 쓰러져 있는 국민들을 각자의 존재목적으로 일으켜 세우는 새 정치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