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26 07:09
[N.Learning] 사회 붕괴의 위험한 전조들: 늘어나는 아노미 자살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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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붕괴의 위험한 전조들:
늘어나는 아노미 자살
코로나 팬데믹으로 자가격리 등 분산사회(distributed society)가 가속화되어짐에 따라 개인들이 무너진 유대를 개인적으로 의미 있게 복원해내는 능력을 잃고 심각하게 자살의 유혹에 빠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통계가 산출되고 있다.
아노미(Anomie) 자살이란 불란서의 사회학자 Durkheim이 만든 용어로 사회적 연대의 붕괴로 사회적 고립감이 증가할 때 개인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살을 결정하는 현상이다. 아노미 자살은 생활이 어려운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생활이 어려워질 때는 사람들은 생존에 집중하기 때문에 자살율 자체는 떨어진다. 또한 지금은 적어도 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굶어서 죽는 수만큼 의도적으로 목숨을 끊은 숫자도 천정부지다. 아노미 자살은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자살을 시도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이 추락하는 사람들을 구해낼 사회적 유대라는 그물망이 붕괴했을 때 생기는 사회적 현상이다.
지신이 목적을 생산하기보다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목적에만 위존해서 개인적 삶의 의미를 운용하던 사람들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목적의 사회적 붕괴에 더 큰 희생양이 된다. 자신이 스스로 목적을 찾아서 목적의 생산자가 되었던 삶의 존재우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노미 자살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아노미 자살율의 증감은 사회적 붕괴의 전조를 예고해준다.
최근에 나온 통계자료를 보더라도 심각하다. 3-6월 사이에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을 찾은 공식적 통계는 7천 4백명을 육박한다. 특히 20대 여성자살 시도자가 다른 범주에 비해 4-5배 높다. 젊은 여성이 아노미 자살에 가장 취약한 위험군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살예방을 위한 전화인 1393에 걸려오는 전화건수는 예년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고 있다. 상담전화를 분석한 내용도 예년에는 문제해결을 위한 정보를 요구하는 전화가 많았는데 지금은 그냥 죽고싶다. 삶의 의지가 없다는 표현이 지배적으로 많아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빅터 프랭클은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였으며,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카우퍼링과 투르크맨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빅토르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죽음의 수용소>라는 저서에 기록했다. 책은 죽음 앞에서도 삶의 공간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최적화 시킴을 통해 아노미 자살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빅터 프랭클은 목적의 생산자였다.
빅터 플랭클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죽어 시체로 나가는 사람들이 현격하게 줄어 들었다가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다시 원래의 숫자로 돌아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연구에 대한 그의 설명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긍정적 기대를 하게 되고 그 기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희망에 부풀어서 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풀려나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삶 자체가 생기가 있어지고 그래서 결국 생존율도 높아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자신들은 풀려나지 않아서 실망하게 되고 결국 상황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떤 계기에 노출되어 어이없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죽음도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생존하지 못한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운신 공간을 마련하는데 실패했고 이 공간을 빼앗긴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했다고 봤다.
아노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자신이 최소한으로 운신할 공간조차도 빼앗겼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들이다. 아노미 자살의 유혹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팬데믹이 곂친 지금과 같은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이 속에서 시간을 염두에 두고 가상의 수용소 생활을 최적화 하는 방식을 찾아냈다.
경제도 L자 경기로 꺽졌고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 되는 상황에서 미래는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국면이다. 절대적 상황에서는 비교가 무의미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닦친 주관적 상황은 빅터 프랭클이 나찌 수용소에서 직면했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다. 실제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삶보다 못한 삶으로 해석하는 젊은이들 특히 20대 여성들이 급증하고 있다.
사람들은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도 자신이 그 암울한 상황을 자신의 상황으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상황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상황의 노예가 된다. 이 상황을 이겨낸 사람들은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아 남아야 할 삶의 이유(목적)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가상의 울타리를 맘들고 이 목적을 상황에 개입시켜 새로운 맥락을 가진 운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삶의 목적에 대한 의미 상실이 자살의 시도를 늘린다면 실제로 이들이 자살을 시도했을 때 이들을 살려내는 장치는 사회적 유대라는 안전 그물망이다. 자살의 충동에 시달리고 있는데 주위에는 이야기할 친구나 가족이 없다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이들을 자살에 성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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