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묘사한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충분히 성장하면 자신이 알 속에 갇혀 살고 있음이 고통스러워 어미에게 신호를 보낸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 알에서 깨어나게 도와달라는 신호다. 어미는 병아리가 보내는 신호를 듣고 병아리가 자신의 여린 부리로 신호를 보내는 곳을 같이 쪼아서 병아리를 알에서 깨어나게 도와준다. 병아리가 신호를 보낼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음에도 병아리를 빨리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에 어미가 먼저 알을 깨면 결국 병아리는 죽는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빨리 성장시키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부리로 알을 깨서 결국 자식을 사산시키는 우를 범한다. 자식은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음에도 본인의 삶을 모범답안인양 강요하거나 조기교육을 강요하거나 심지어는 본인이 성취하지 못한 일을 대신해 이뤄주기를 갈망한다. 부모의 이런 잘못된 사랑은 결국 자식농사를 망치는 첩경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자신의 몸이 성장하는만큼 자신의 정신이 성장하지 못해서 생기는 성장통을 체험한다. 성장통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그냥 놔두는 것이 상책이다. 단 우리 부모는 자신에 대한 긍휼감이 있어서 언제든지 자신이 고통을 호소하면 달려올 것이라는 확신의 끈을 쥐고 있게 해야한다 . 자식이 몸이 커서 알에 갇힌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에 대해 신호를 보낸다. 이 신호를 면밀하게 듣고 있다가 자식이 스스로 주도성을 가지고 알을 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즐탁동시다. 자식이 신호를 보낸다고 이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삶을 강요하면 결국 알을 깬 후 성인이 되어 자신의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놓치게 된다. 스스로 알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주도성을 허락해야 한다. 주도성은 삶의 중간에 다시 알에 갇히더라도 다시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의 기반이 된다.
직장내에서 맨토와 맨티의 관계에서는 더 민감한 문제이다. 맨티를 어린이 취급하고 맨토가 모든 답을 제시해준다면 설사 이 답이 유용하더라도 맨티는 자신의 발로 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요즈음 밀레니얼 젊은이들은 지식의 내용으로 따지면 언제든지 서치를 통해 맨토보다 많은 지식을 접하고 산다.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런 지식 중 어떤 지식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답은 아무리 유용해도 이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밀레니얼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맨토는 맨티에게 생선을 제공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통했다. 하지만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도 이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요즈음 맨토링의 기본골격이다.
상처받은 성인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의사가 상처받은 사람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상처받은 사람이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있으면 밖에서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안에서 열쇠를 풀 때까지 밖에서 조용히 기다리다 안에서 나가겠다는 신호를 보내면 밖에서도 열어주는 방법이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