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를 재미있게 봤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특징은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특히 안 되는 것도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평범하고 남들이 보기에 촌스런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이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새록새록 새로운 대본을 써가며 새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삶이 밋밋해져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삶의 새로운 스토리가 더 이상 생성되지 못함이 불행이다.
삶이 밋밋해지는 것은 삶이 일상이라는 두꺼운 알 속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삶의 일상은 우리를 알 속에 가두고 매일 매일 알의 두께를 키운다. 구씨에게 알은 알콜중독이고, 창희에게 알은 생계이고, 염미정에게 알은 지루함이고, 염기정에게 알은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음이다. 극에서 알은 삼남매가 경기도 외곽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독한 촌스러움으로 묘사되어 있다. 알 속에 갇힌 삶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신선한 스토리를 생성하지 못한다.
알 속에 갇힌 이들이 자신들을 알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일지를 쓰기로 작정했다. 하루하루 자신에게 즐탁동시를 해가며 해방일지를 기록했다.
이 드라마가 묘사한 해방의 과정은 기승전결이라는 네개의 플롯을 가지고 전재된다.
첫째 기의 단계는 알 속에 갇혀 삶의 신선한 스토리가 없이 고통스럽게 진부해진 자신들을 인정하고 환대하는 일이다. 첫째 단계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가해놓은 촌스러움과 일상중독 등의 알껍질이 아니라 오롯이 쓰러져 있는 자신의 고통에 집중해야한다.
둘째는 승의 단계다. 승에서는 알 속에서 꺼내 자신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이때 동원되는 도구가 추앙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거세게 추앙하는 것으로 자신을 다시 알 속에 가두려는 일상의 음모에 대항한다. 일상은 큰 사건이 없는 무탈함을 무기로 이들에게 알 속에서 지금처럼 편하게 지내라고 조언한다. 추앙이란 이런 일상의 조언에 대항해서 자신을 자신 삶의 작가이자 주인공으로 세우는 작업이다.
셋째 단계는 전의 단계다. 자신들을 거세게 추앙함을 통해 남들이 명령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가꾼 삶이 생각보다 신선함을 맞본다. "이게 너답게 사는 거야"라고 해방을 선언한다.
극에서 마지막 단계는 보여주지 않지만 이들 삶에서는 진행형이다. 해방을 체험하며 날아간 새가 삶의 스토리를 잃고 다시 새장으로 돌아올 수도 있고 해방을 넘어 자신만의 삶의 존재 스토리를 향해 영원히 날아가는 자유를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방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를 내려놓는 자유에 대한 체험을 만끽하기까지는 종결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실현해서 약속을 지키고 약속에 대한 중압감에서 훌훌 벗어나는 것이 해방을 넘어선 진정한 자유에 대한 체험이다.
새장 속에서 길들어진 새들은 우연한 기회에 새장을 탈출해 해방을 체험하지만 대부분은 자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새장으로 돌아와 자신을 가둔다.
아래 르네 마그네트의 여정이라는 그림이 상징하듯 알에서 꺼내짐이라는 해방과 자유를 향해 날아감은 다른 문제다.
해방은 자유에 의해서만 종결된다. 자유에 의해 종결되지 못한 해방은 차이를 만들지 못한 반복이다. 자유를 깨달지 못한 자들의 해방은 시즈프스 형벌일 뿐이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지 못하는 지루한 삶이 다시 형벌처럼 십자가를 부가할 것이다.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달기 전까지는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내리는 고통스런 삶을 반복할 것이다. 우리의 대부분 삶은 해방을 소확행으로 여기며 소확행을 반복하는 것으로 종결될 것이다.
구씨와 촌스런 삼남매의 용감한 해방일지가 르네 마그네트가 그리는 <자유의 여행>으로 종결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