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3-12 11:24
[N.Learning] 긍휼과 목적의 협주 노예 vs 주인
 글쓴이 : 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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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과 목적의 협주
노예 vs 주인
주임됨의 첫 번째 비밀은 사랑이다. 연인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가며 각종 영화를 찍는다. 상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끝났음에 대한 전조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에 대한 대본도 스스로 써나가고 이 대본에 따라 서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랑의 대본이 쓰여지지 않는 순간 상대는 내 삶의 도구이자 노예로 전락한다.
사랑이 상대와 자신을 주인으로 만드는 것에 결정적이지만 우리를 주인으로 일으키는 진짜 사랑은 멋진 것을 넘어 자신과 상대의 아픔조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긍휼의 사랑이다. 예를 들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복권인 재능, 좋은 머리, 건강, 미모 등만을 편애하는 사랑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이런 유전자 복권에 의해서도 세상의 문제가 풀리지 않아 구박 덩어리로 전락할 처지의 자신조차 자신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자기긍휼이 자신을 온전하게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비밀이다. 자기긍휼로 자신을 일으킨 사람만 다른 사람의 아픔도 긍휼로 일으켜 세운다. 자신도 환자가 되어 누워 있다면 자기긍휼로 자신을 온전하게 치유해서 주인이 되기까지는 다른 아픈 사람들을 손님으로 환대해 온전한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행위에 나설 수 없다.
긍휼은 상호적일 때 주인됨의 폭발적 에너지를 만든다. 상대의 아픔을 긍휼로 사랑해 상대를 일으켜 세우려 해도 상대가 자기긍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마음이 없다면 긍휼은 사랑이 아니라 윤리적 의무로 전락한다.
자기긍휼은 고통조차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혁신적이고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고통은 몸의 차원에서 인지될 때 통증이고, 마음의 차원에서는 느껴지면 고통이고, 정신의 차원에서 전달되면 고뇌다. 몸의 차원에서 느끼는 통증은 사실 남이 대신 아파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의 차원의 문제는 병원에서 물리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문제다. 문제는 마음이 체감하는 고통과 정신이 느끼는 고뇌의 문제다. 고통과 고뇌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마음이 체감하는 고통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에서 발생한다. 문제를 고식적으로 진통제 처방으로 해결하거나 반창고를 붙이는 행동이 습관화 되면 상처에 구더기가 생기고 고름이 생긴다. 해결되지 못한 상처는 스트레스를 축적해 관련된 사람들 몸에 암 등의 흔적을 남긴다. 긍휼이란 오랫동안 고식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문제에 구더기가 생겼고 구더기가 무서워 덮어 논 거적을 들춰내는 용기다. 문제가 원인의 수준에서 파악이 되고 치유되어 온전한 마음으로 뛸 수 있는 근력을 만드는 힘이 마음을 치유하는 긍휼이다.
최고의 긍휼은 자신의 정신적 고뇌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원인의 수준에서 근원적이고 혁신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때이다. 몸의 통증, 마음의 고통, 정신의 고뇌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에서 문제해결력이 생겨 고뇌가 해결될 때 우리는 가장 높은 수준의 희열을 경험한다.
정신에 이입되는 문제인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삶의 목적함수가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 고뇌 수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이 존재목적이다. 존재목적이란 자신이 왜 세상에 태어나 이런 고뇌를 감당하고 살아야하는 지에 대한 이유다. 이 이유를 각성하지 못한다면 긍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도 어려운 일을 만나면 다시 쓰러지고 포기하는 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존재목적이란 자신의 문제이고 세상의 문제인 고뇌를 해결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주인으로 나서야 하는 지를 자신에게 설득하는 이유이자 세상에 대한 약속이다. 자신이 왜 대체 불가능한 주인으로 나서야 하는 지의 이유가 존재목적이다. 자신의 몸의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대체불가능한 사람으로 나서는 것은 이런 신성한 이유를 구성하지 못한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인으로 나서는 것은 이유가 될 수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약속으로 다짐하고 필요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다. 자신이 세상을 다녀감에 의해 세상이 더 행복해지고 건강해지고 더 평평해지는 이유가 목적이다. 목적이 실현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주인이 되어 고뇌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목적은 고난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고난이 찾아와 일시적으로 주저 앉아도 자신이 반드시 주인이 되어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사명감은 자신을 다시 오뚜기처럼 일으켜 세운다.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 대체불가능한 자신의 정체성도 사라진다. 이름을 걸고 약속한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반복은 고난에 대한 회복탄력성을 키우고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수 있는 자기효능감도 키운다.
긍휼이 우리를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사랑의 에너지라면 존재목적은 이 에너지를 이용해 자신이 대체불가능한 주인으로 서야하는 이유이다. 긍휼이 에너지라면 목적은 이 에너지에 불을 붙여주는 스파크다. 목적이 있다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힘을 얻는다. 세상에 주인으로 살고자하는 기력이 떨어졌다면 아마도 긍휼과 목적이 고갈된 상태일 것이다.
진정성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목적과 긍휼에 대한 진심을 가지고 주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성(Authenticity)의 어원은 작가십(Authorship)과 같다. 자신 삶이 목적과 긍휼로 만들어진 협주곡을 스스로 써낼 수 있는 정신이 진정성의 일인칭 작가 정신이다. 작가 정신을 잃는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써준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아닌 주인이 써준 대본을 돈 받고 성실하게 연기하는 마름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긍휼과 목적이 만들어낸 삶의 이중주를 작곡하고 연주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목적에 대한 믿음에서는 급진성을 보이는 반면 여기에 도달하는 방식은 긍휼로 에너지를 얻는 급진거북이의 삶이 우리를 주인으로 만들어준다.
급진거북이(잉걸북스, 2024)가 연주하는 목적과 긍휼의 이중주는 임제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의 가르침에도 표현되어 있다: "작은 일에서도 주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산다면 하는 모든 일에서 진실이 드러난다." 급진거북이는 사랑과 긍휼의 이중주로 삶의 진실에 가장 근접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비밀이다. 급진거북이가 되어 주인으로의 삶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어느 순간 진실을 실현하는 길을 잃고 헤매다 거짓 진실인 각종 음모론을 만든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해 이들의 노예로 사는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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