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사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주는 사람인가?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 실상을 비전으로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다고 그 실상을 무시하는사람들에게는 미치는 영향력은 공포와 불확실성으로 규정된다. 결국 믿음이란 우리 삶이 주는 불확실성과 공포를 제거해가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 보인다면 불확실성과 위험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이고 믿음도 그 가치를 잃는다. 믿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믿음에서 지정한 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곁다리로 불거져 나올 수 있는 대안들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A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 나와서 B가 더 낫다고 설득해도 이 설득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미다. 개인의 믿음도 대안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데 집단에서 공유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도 이런 믿음에 대한 의지를 노래한 것이다. 선택하지 않아서 손해 볼 기회비용에 대한 미련과 회한을 지워버리고 지금 선택한 길에 충실하겠다는 다짐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각종 서약을 한다. 결혼 서약은 믿음에 대한 서약이다. 결혼 서약은 결혼 생활 중 지금 파트너보다 더 나은 파트너가 나와도 지금 파트너에 헌신하는 손해 즉 기회 비용을 감내하겠다는 약속이다. 결혼에서는 원한다면 위자료를 감수하고라도 다른 파트너를 찾아서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서약을 파기하는 허들은 있어도 결혼에서 믿음은 충분히 깨질 수 있다. 회사에서도 어떤 구성원이 조직에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회사에서 지금 회사에서 받는 연봉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하고 스카웃 제의를 해볼 수 있다. 1000 만원을 더 준다고 했을 때 이직을 하지 않고 있다가 2000 만원으로 금액을 높였을 때 이직을 결정한다면 이 사람의 회사에 대한 믿음은 2000 천 만원이다. 천 만금을 주어도 이직 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무한대다. 그렇다면 모든 믿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절대적 믿음은 없을까? 절대 부러질 수 없는 믿음은 아무리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해도 기회비용의 문제를 초월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음을 담보로 지금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할 때다. 구약 성경의 다니엘서 3장에 보면 바벨론 제국의 왕 느부갓네실과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가 살던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의 이야기가 나온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만든 거대한 우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절하도록 명령한다. 하나님을 믿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숭배라는 생각으로 거절한다. 분노한 느부갓네살 왕은 이들을 불타는 뜨거운 화덕에 던져 넣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불 속에서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화덕 안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들을 보호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목격한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깨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석방하고 유배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숭배하도록 허락한다. 이 세 사람의 믿음이 노예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는 계기를 만든다. 왕이 우상 앞에서 절하기를 거부하는 세 사람에게 절하지 않으면 불구덩이에 넣겠다고 위협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런 협박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왕이시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 던지셔도 능히 건져내시리라고 믿습니다.“ ”설사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 세우신 금상에는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대적 믿음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관한 설명이다. 믿음이란 그 믿음에 헌신함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어떤 상처도 감내하겠다는 의지다. 친구를 믿는다는 것은 친구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 볼 수 있는 상처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버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드락, 메삭, 마벳느고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을 제외한 우상이 어떤 매력적인 조건을 달아 보상을 약속해도 이들을 포기하는 기회비용을 기꺼이 희생하고 감내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설사 지켜지지 않아서 죽음에 처하게 되어도 ”그럼에도“를 외쳐가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시험을 볼 때 늦은 나이에 얻은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핏줄을 포기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택해 믿음의 아버지로 태어났다. 믿음에 대한 헌신은 이 믿음을 실현하는 일과 관련된 도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불확실성을 제거한 길을 만들어준다. 다니엘서에 이런 심리적 안정지대는 세 사람이 불에 던져졌으나 이들을 보호하는 천사의 역할에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같은 능력이라면 이런 심리적 안정지대 안에서 헌신하는 사람과 이런 울타리가 마련되지 못해 불안에 떨며 일하는 사람 중 누가 미래를 만들어낼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사이비 종교나 무속처럼 잘못된 믿음이라면 믿는 것이 더 큰 화를 가져올 위험이 있지만 죽음을 담보로 지키는 제대로 된 믿음을 지키는 극소수의 사람이 미치는 선한 영향력을 이길 방법은 없다. 특히 이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믿음이 공의로운 세상을 위한 믿음일 때는 더욱 그렇다. 세상은 이들 극소수의 믿음을 밀알로 삼아 변화의 물꼬를 만들어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우리에게 목숨 혹은 자신의 핏줄과 맞바꿀 수 있는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영역이 있을까?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한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존재목적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죽음에 대항해 지켜야 할 자신에 대한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포기하는 일이다. 상황에 따라 생존을 핑게로 이름을 포기해가며 거짓말을 밥 먹듯해가며 얼굴을 바꾸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과 이름을 걸고 지켜야 할 존재 목적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믿음의 사람이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공의로운 가치와 존재목적이 있고 이에 실제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가치와 존재목적이 없다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님에 대한 자기 고백이다. 존재목적에 대한 약속조차 없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 재능, 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이들에게 일말의 믿음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들이 평상시 보이는 믿음은 자신의 부, 명예, 권력을 지키기 위한 예측 가능한 연기일 것이다. 대한민국이 지금 겪고 있는 극단의 혼란은 예측을 의한 각종 무술인과 전문가들이 넘쳐나는데 이들에 밀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취를 감춘데서 찾을 수 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은 무속인과 전문인이 해내는 예측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희생과 아픔을 감내해가며 실제로 만들어낸 미래에 대한 설명이다. 믿음의 사람으로 인지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결이 있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결이 있는 사람"이란 호칭은 내가 나로서 존재우위를 확보했다는 의미다. 최고의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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