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3-26 11:01
[N.Learning]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를 쓰다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3,339  

텍스트를 넘어 컨텍스트를 쓰다.
글을 쓰는 두 가지 방식

몸이 내 삶의 텍스트로 작용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내 글이 내 삶의 텍스트란 사실은 잊고 지냈다. 문장의 텍스트 속에 내가 살아 있는 글을 쓰려면 어떤 삶이 필요할까? 철학하는 분들은 자신의 주체성이 들어간 텍스트로 글쓰는 것을 중시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을 넘어 생각을 공유하고 실현시켜야 하는 사화과학도로 사람들에게 글을 통해 나의 텍스트를 넘어 우리라는 컨텍스트를 체험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주어에 나를 빼고 우리라는 말로 대체하면 되는 것인가? 아마도 사기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항상 주어를 우리로 시작해서 쓰고 서양은 나로 시작해서 쓰지만 이것만으로 한국사람들이 컨텍스트를 글에 제대로 반영한다고 결론내리기는 찜찜하다. 존재론적 관계맺음이나 긍휼감 등, 무엇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차이가 있는 사람이 텍스트를 넘어서 컨텍스트가 반영된 글을 쓰는 것이다.

Jin Seok Choi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고향을 떠날 궁리만 했습니다. 고향은 너무 빈궁했고 남루했습니다. 게다가 지루하기까지 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하릴없이 마루에 누워 시간을 파먹다 보면, 모든 것이 지쳐 늘어져 있는 와중에 살아 있는 것이라곤 매미 한 마리뿐이었습니다. 매미 울음소리는 지루함을 더 지루하게 합니다. 하얀색을 더 하얗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파란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리거나, 단 맛을 더 달게 하기 위해서 소금을 조금 넣는 일처럼 매미가 내는 소리는 고요를 더 고요한 곳으로 내려놓습니다.

나는 고향의 남루함과 지루함을 이겨내려 도시를 떠돌고 국경도 넘나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부모님은 나에게 좋은 뼈와 살을 주셨습니다. 쉽게 지치지 않았고, 남 앞에서 울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타향은 아득한 것, 아무리 걸어도 닿지 않았으며, 눈을 비비고 살펴도 안개 속이었습니다. 고향에서 타향까지의 그 종잡을 수 없는 거리에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썼습니다.

나의 문자들은 고향과 타향 사이의 울퉁불퉁한 거리에서 삽니다. 이제는 압니다. 소리와 고요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폭의 크기와 지루함의 깊이가 정비례 한다는 것을. 고향과 타향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나의 문자들은 울퉁불퉁한 거리에서 항상 나와 함께 했습니다. 어찌 모를 리 있겠습니까. 문자는 완전히 그 소유자의 몸입니다. 무학이셨던 제 어머니는 가끔 이렇게 나무라셨습니다. “배운 사람이 글먼 쓴다냐?” 고향에서 어머니로부터 문자의 책임성을 내내 배웠습니다.

이제는 문장들 사이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문자들 속에 심어진 혈관과 힘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장도 문자도 결국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문장의 주인입니다. 사람처럼만 살다보면, 내 문장에도 문자에도 피가 흐르고 그럴싸한 소리가 나리라 믿습니다. 그 피와 소리가 고향도 살리고 시대도 살릴 것입니다. 금방 죽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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