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피디엠 (Carpe diem)에 대한 오해
시간을 현재화 하라
까르피디엠을 그대로 직역하면 <현재를 잡아라; 현재에 충실하라; Seize the present>란 뜻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냥 현재를 즐겨라라는 잘못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미래가 암울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종말론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그냥 지금 남아 있는 현재를 쾌락적으로 즐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명하게 갈라진다. 종말론을 따라가기보다는 현재를 쾌락해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를 가장 많이 왜곡한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 누구도 이 쥐벼룩과 이 쥐벼룩에 감염된 사람들을 특정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특정이 안 되니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재앙이라는 종교적 해석이 가장 유력한 해석으로 인용되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해석에 반기를 들고 보카치노는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양한 10명의 화자가 10일간 머물며 100편의 소설을 펼쳐가는 천일야화식 소설인 <데카메론>을 완성했다. 보카치노는 <데카메론>의 주제를 언제 죽을지 모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카르피디엠"로 제시해 큰 반향을 얻었다. 심지어 데카메론에서는 아브라함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지금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지 않으니 일부 목회자들은 흑사병 당시의 목회자들처럼 종말론의 유혹에 사로 잡혀 이것의 가능성을 시도해보기 위해 광화문 집회에도 나가보고 전광훈 목사 교회에도 참여해보았을 것이다. 결과는 지금 목격하듯이 자신과 교인들과 가족들을 코로나의 숙주로 전락시켰을 뿐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가며 야심차게 종말론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자신과 교인들의 삶을 더 비극적으로 만들어 스스로에게 종말을 선고한 셈이다.
까르피디엠의 원래 의미는 <미래와 과거를 현재화하라>는 뜻이다.
동물의 두뇌와 달리 인간 두뇌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시간여행자로서의 기능이다.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미래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상상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하게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거나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인간이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과거로 자신의 의식을 여행보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과거의 18번과 영광만 되 새기며 사람들도 있고, 미래만 상상하다 이 상상의 덫에 걸려 꿈만 꾸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처럼 과거의 기억조차 잊고 만화경처럼 미래의 상상만을 쫓아 사는 사람들은 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들은 천년을 살아도 미래를 만들지 못한다. 뇌의 입장에서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상상된 체험일 뿐이지 실체가 없다. 뇌는 현재만을 살 뿐이다.
탁월한 몇몇의 선구자들이 현재만을 시간으로 알고 살고 있는 뇌를 속여서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냈다. 뇌를 속이는 방법이 바로 까르피디엠, 시간의 현재화이다.
현재화의 능력이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한 것을 넘어서 이것을 가져와 현재와 접속시켜 이것들을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과거의 현재화란 과거 속에 뭍혀 죽음을 당하고 있는 기억들을 현재와 접속시켜 현재의 의미로 부활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현재와 접속시켜 현재를 위해 오래된 새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거의 현재화다.
미래의 현재화란 미래가 지향하고 있는 목적의 씨앗을 지금 현재로 가져와서 과거에서 물려받은 좋은 유산이라는 씨앗과 교배시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내고 이 씨앗을 현재라는 토양에 새로운 과일나무로 키워서 이 과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미래를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이런 능력은 미래의 목적을 현재로 가져와 현재를 통해 과일나무로 키워낼 수 있는 능력이다.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는 미래의 현재화 작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숭아와 오얏은 꽃과 열매가 있어서 굳이 말로 떠들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향기를 맡고 찾아오게 되고 따라서 복숭아와 오얏 과수원 아래로 저절로 길이생긴다. 누군가가 복숭아와 오얏이라는 미래의 씨앗을 만들어 과수원을 만들면 사람들이 향기를 맡고 이 향기에 이르는 만들어 과수원을 찾아오게 하는 원리가 미래의 현재화이다. 과거의 현재화가 기억으로 죽어가는 과거를 살려내 <오래된 새길>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미래의 현재화는 스쳐지날 수 밖에 없는 과수원에 <미리 가본 새 길>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지 않은 길>이라는 두 길을 놓고 결정할 때 두 길 다 낙옆에 감춰져서 가지 않을 길처럼 보여서 고민했지만 자세히 관찰해 남들이 가지 않은 길로 보이는 길을 택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옳바른 길이라는 보장이 없어서 나중에 후회지 모르지만 이 길을 택한 것에 자부심을 노래한다.
프로스트의 길 걷기는 미래는 누군가는 가보지 않은 어느 곳에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이 믿음에 따라 이 길을 선택해 실제로 남들보다 먼저 가보는 미래의 현재화 작업을 암시한다. 프로스트는 미리 가 볼 새길을 선택하는데 이 길이 목표를 달성하는 이유인 목적으로 이르는 길인지를 물었어야 했다. 목표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길은 현재의 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목표를 미래로 착각한다. 이 목표가 목적으로 이어질 경우 길은 미래의 길이 된다는 것을 잊는다.
결국 미래의 길은 많이 가고 적게 가고의 문제라기보다 그 길이 목표를 넘어 목적으로 이어지는 길인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푸로스트가 물었어야 하는 질문은 어떤 길이 목표가 종착역이 되는 길이고 어떤 길이 목표를 통해 목적이라는 미래로 이어지는 길인지를 물었어야 했다. 어떤 길이 목표를 통해 숨겨진 목적이라는 미래가 드러나게 하는 길인지를 찾았어야 했다. 목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모든 길은 미래의 길은 아니다. 미래는 목표를 넘어 목적을 현재로 가져와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사업의 토양 속에 심어서 과수원을 가꾸고 사람들이 이 과수원을 찾아오게 만드는 작업이다. 과수원에 목적의 향기가 충분하다면 내가 굳이 어렵게 길을 내야 할 이유도 없다.
벤치마킹을 통해 미래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현재화 능력이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미래를 현재화 하기보다는 꿈을 쫒아 파랑새처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만들어낸 남의 복사품의 미래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들을 통해서는 절대로 미래를 만날 수 없다.
카르피디엠(Carpe diem)은 현재에 충실하라(Seize the day)는 언명이다. 뇌는 기억만 과거로 생각하고 하고 상상만을 미래로 생각하게 종용하지만 인간이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만든 것은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런 미래와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부활시킨 덕택이다. 현실의 통로를 거치지 않고 의미 있게 부활된 과거나 새롭게 드러나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란 미래와 과거가 현재를 통해 부활해 서로 유산이라는 바톤을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아 후세에게 역사로 남겨질 유산을 다시 만드는 것이 현재화의 본질이다. 까르피디엠 즉 시간의 현재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후세에게 역사적 유산을 남길 방법은 없다.
까르피티엠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미래를 만들어 후세에게 찬란한 역사적 유산을 남긴 사람들 삶의 비밀열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