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인간은 환대의 주체이다. 환대의 대상은 자신의 고통이다. 자신이 아파서 쓰러져 있는데 손님을 손님답게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레비나스와 달리 진성리더십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환대인 Self Compassion에서 시작한다. 내가 배가 고픈데 다른 사람이 대신 밥을 먹어줄 수 없듯이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이 나의 주체가 되어 대신 아파줄 방법이 없다. 내 자신이 아픔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감내할 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 고통은 인간을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주체로 세우는 힘이다. 우리가 자기 긍휼로 자신을 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가 뽑아 준 유전자 복권(머리, 외모, 재능, 건강, 성별, 부유한 부모)에 대한 편애 때문이다. 유전자 복권을 지나치게 향유하다보면 유전자 복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을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은 성인아이의 아픔을 가지고 산다. 진성리더십에서 환대는 성인아이의 아픔에 대한 환대다. 자기 성인아이의 아픔을 다른 사람이 대신 아파해줄 수 없다. 오직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만 주체로 세워진다.
이런 공동의 주체가 많아져서 사람들의 이름을 묻지 않고 아픈 사람들이 일어설 수 있는 운동장이라는 플랫폼을 만들고 이 플랫폼을 통해 유전자 복권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들도 아픔을 치유하고 주체로 거듭나고 거듭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는 일에 나설 때 주체는 주인이 된다. 주인이란 목적에 가장 근접한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다. 레비나스와는 달리 진성리더십은 이런 공의로운 플랫폼 운동장이 구축되어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협업할 때의 즐거움을 개인적 향유와 다른 사회적 향유라고 칭한다. 논어의 예기 편에 실려있는 경업낙군도 이런 사회적 향유를 느끼는 상태다. 세종이 꿈꾸었던 생생지락하는 조선도 이런 국가적 향유가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이 종종 경험하는 신바람도 이런 집단적 향유의 상태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중국 요임금 시대백성들이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하는 고복격양 (敲腹擊壤)가도 사회적 향유의 상태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