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대한 용기가 주인을 만든다
환대(Hospitality)에 대한 정의
인간은 향유의 주체이자 환대의 주체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존재론적 물질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고 타자의 고통을 해결하는 주체를 환대의 주체로 보았다. 환대와 향유 주체로서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사물과 달리 인간을 욕망 충족을 위한 향유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절대적 타자로 환대하려는 레비나스의 배려다.
진성리더십은 아픔에 대한 환대에 대해 레비나스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먼저 진성리더십에서 리더가 아픔을 환대하는 첫 대상은 레비나스의 절대적 타자이자 데리다가 이름을 묻지 않고 환대하는 절대적 환대 대상인 과부, 고아,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진성리더십에서 환대는 자신의 아픔에 대한 환대가 출발점이다. 자신의 아픔에 대해 환대하지 못하는 리더는 타자에 대한 환대의 근력을 획득하지 못한다. 스스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만 역지사지 타인의 눈물 젖은 빵의 아픔을 이해한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의 타인에 대한 환대는 의무나 책임감에 의한 윤리적 환대이지 주체적이고 자발적 환대는 아니다. 진성리더십에서는 자신이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이 아픈 사람이 손님으로 찾아 왔다해도 온전한 주인이 되어 손님을 환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아픔이 주체성의 본질인 이유는 아픔은 남들이 대신 아파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아픔을 감내할 때 아픔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자기긍휼을 통한 자신의 아픔에 대한 진솔한 환대는 인간을 가장 원초적인 수준에서 주체로 세우는 힘이다.
우리가 자기긍휼로 자신을 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이 대신 뽑아 준 유전자 복권(머리, 외모, 재능, 건강, 성별, 부유한 부모)에 대한 지독한 편애 때문이다. 유전자 복권으로 받은 것은 향유의 대상이다. 유전자 복권을 지나치게 향유하다보면 유전자 복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은 성인아이의 아픔을 가지고 산다. 진성리더는 자신 성인아이의 아픔을 인정하고 환대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자신 성인아이의 아픔을 다른 사람이 대신 아파해줄 수 없다. 오직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는 사람들만 온전한 주체가 된다.
레비나스와는 달리 진성리더십에서는 향유와 환대가 분리된 개념이라기보다 연결된 개념으로 생각한다. 진성리더십은 물, 공기, 산소 등을 향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보다 삶의 정체성과 공동의 목적을 향유하는 고차원 주체로서 인간에 더 관심이 있다. 자신과 타자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서 공의로운 운동장(공동체)을 만들어낸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 진성리더는 이런 운동장을 설계하고 만들어내는데 평생을 헌신한다.
진성리더십에서 물, 공기, 자연에 대한 욕구만족을 통한 일차적 향유를 주관적 행복(Subjective Well-being)이라고 규정하는 반면 존재목적을 가진 자신 삶의 주인됨을 만드는 고차원의 향유를 궁극적 행복의 상태인 유데모니아(Eudemonia)라고 규정한다. 공의의 운동장에서 공동의 존재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협업을 통해서 자신 삶의 공동의 주인됨을 실현할 때 가장 고차원의 향유 상태인 집단적 유데모니아(Collective Eudemonia)를 경험한다.
자신의 아픔을 환대해 긍휼의 눈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비슷한 아픔을 경험하는 타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아픔의 공동 주체로 나서는 것이 긍휼(Compassion)이다.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일어선 자기긍휼이 없었다면 다른 아픈 사람들을 손님으로 초대에 일으켜 세우는 긍휼의 주체가 될 방법이 없다. 자기긍휼이 자신의 아픔에 대한 주체로서의 환대라면 긍휼은 타자에 대한 환대다.
자신의 아픔도 환대하는 힘으로 타자의 아픔도 환대하고 더 나아가 환대의 공동체가 세워져 사람들이 이름을 묻지 않고 아픈 사람들을 환대하기 시작할 때 절대적 환대의 단초가 마련된다. 절대적 환대는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환대하는 관계적 환대와는 달리 이름을 묻지 않고 환대하는 제도적 운동장이 요구된다. 이름을 묻지 않고 아픔을 환대하는 플랫폼을 세우고 이 플랫폼을 통해 유전자 복권을 타고 나지 않은 사람들도 아픔을 치유하고 주체로 거듭나고 거듭난 주체들이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는 일에 나설 때 절대적 환대가 달성된다. 절대적 환대의 상태를 통해 모두가 목적의 공공 주인을 체혐한다. 이런 체험이 집단적 향유다.
진성리더십에서 절대적 환대의 운동장에 협업의 주체로 설 때 개별적 주체는 주체를 넘어 온전한 주인이 된다고 가정한다.
주인감이란 니체가 어린이 상태라고 표현했듯이 목적에 가장 근접한 삶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유데모니아 감정이다. 레비나스와는 달리 진성리더십은 이런 공의로운 플랫폼 운동장이 구축되어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협업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적 향유와 다른 집단적 유데모니아라고 칭한다. 논어의 예기 편에 실려있는 경업낙군도 이런 집단적 유데모니아를 느끼는 상태다. 세종이 꿈꾸었던 생생지락하는 조선도 이런 국가 차원의 집단적 유데모니아가 가능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번 탄핵에서 국민들이 느꼈던 시민들에 대한 환대도 집단적 유데모니아다. 대한민국이 종종 경험하는 신바람도 이런 집단적 유데모니아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중국 요임금 시대 백성들이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부르는 고복격양 (敲腹擊壤)가도 집단적 유데모니아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아픔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환대하기 시작했을 때 주체성을 경험하고 주체성의 근력을 형성했을 때 아픈 타인을 손님으로 받아 들어 이들을 자신 삶의 주체로 세우는 온전한 주인됨을 체험한다. 주인이 된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존재목적을 실현하는 협업의 운동장을 만들어낼 때 느끼는 희열이 집단적 유데모니아다. 결국 개인적 향유이든 집단적 향유이든 고통에 대한 환대한 결과다. 특히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 복권에 대한 향유에 빠져 자신의 고통을 환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진정한 향유의 상태인 유데모니아(Eudemonia) 행복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먼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