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때우다 vs 시간을 채우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시간 개념을 지칭하는 두 가지 말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있다. 크로노스는 과거부터 미래로 일정 속도·일정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을 표현하는 반면 카이로스는 체험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베르그 송도 흘러가는 시간과 체험된 시간을 구별한다. 체험된 시간이 없이 허송세월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시간은 빨리 흘러가지만 하루에도 새롭게 체험하는 내용이 많아서 시간이 꽉 차서 흘러갈 경우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이 꽉 차서 흘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은 시간을 채운 사람들인 반면, 허송세월 해가며 시간을 빈채로 흘려보낸 사람들은 시간을 때운 사람들이다. 한때 유행했던 모모의 관점에 따르면 시간을 빈채로 흘려보낸 사람은 시간을 도둑질 당한 사람이라면 시간을 채워서 보낸 사람들은 시간도둑에게 찾아가서 시간을 다시 찾아온 사람이다. 시간을 때워서 흘려보낸 물리적 나이를 결정해주는 것은 크로노스지만 시간을 채워서 만든 체험된 나이를 결정해주는 것은 카이로스의 작용이다.
젊은 시절은 새롭게 체험하는 내용들이 많아도 시간이 안 흘러간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이가 들면 체험하는 시간이 없고 빈채로 흘러가서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구에게나 아이였을 때 아침에 눈을 뜨면 이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지하고 흥분반 걱정 반 고민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빠른 이유는 효율적으로 살아가는 루틴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어떤 답에 대한 대안들에 대해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항상 새롭게 실험해서 이것이 효율적인지 아닌지를 실험해야 한다. 시간의 강에 여기저기 걸림돌이 많았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개발되어서 어느 순간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일들을 처리하는 속도가 신속해지고 시간도 빨리 간다고 느낀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낄수록 더 나이들어감에 대해 느끼게 되고 실제로 이런 체험이 축적될수록 겉늙게 된다. 오랫동안 걸림돌이 없어서 새롭게 해결해야할 과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상황을 맞이해 도움을 받기 위해 소환해야할 과거의 기억도 사라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고 다시 젊음을 찾기 위해선 새로운 루틴을 찾아 탐구여행에 떠나야 한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계를 늦추는 방식으로 시간을 채워나간다. 특히 미래를 앞서가서 목적을 가져와서 현재 속에서 실험하며 미래를 기다리는 행동은 카이로스 시계를 꺼꾸로 돌려 시간의 잔고를 무한대로 늘린다. 또한 이런 목적경영의 여행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배우는 시간으로 시간을 꽉 채워 기억 속에 보관한다. 의미 있는 새로운 것의 탄생을 느낄 때마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것이어서 카이로스 시계의 태엽이 거꾸로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 나이는 들었지만 젊음을 유지하고 사는 사람들의 비결이다. 또한 현재의 체험된 시간을 늘려가며 시간의 흐름을 조절하면 시간에 쫒겨다니는 일도 사라진다.
현재를 새롭게 체험하는 프로젝트가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현재가 지속되는 시간의 체험이다(베르그송). 시간을 채우는 일이 지금하고 있는 일을 통해 성사되고 있다면 현재가 무한대로 연장되어 흐르는 엄청난 시간잔고를 경험한다. 미래의 시간에 거하는 죽음에 먼저가서 깨달음을 얻고 이 깨달음을 삶의 목적으로 가져와 현재의 씨앗으로 뿌려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현재의 삶을 사는 것은 가장 확실하게 현재의 시간을 연장하는 방법이다(하이데거).
니체는 시간의 영원회귀에 대해서 논하는 철학자다. 현재가 채워지지 않은채로 흘려보내진다면 시지프스의 돌굴리기의 무한회귀의 형벌에 처해진다. 현재가 채워지지 않고 흘려보내지면 기억 속에 남은 것이 없어서 치매환자와 같은 몽환을 경험한다. 비슷한 일이 매일 반복적으로 벌어져도 이 일을 해결한 기억을 과거로부터 가져올 수 없어서 같은 실수를 매번 반복해야 한다. 기억이 사라지기 때문에 미래를 위한 재료들이 새롭게 주어져도 미래의 비전을 만들어서 미래를 현재로 편입시키는 일을 하지 못한다. 시지프스 반복 시간에 갇혀 매일 똑같은 단조로운 일을 해야만 하는 형벌에 처해진다.
현재가 채워져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서 현재를 통해 씨앗으로 뿌리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재를 통해 성장체험을 만들어 차이를 반복하는 생산적 영원회귀를 경험한다. 이들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소환되지 못하는 치매환자의 고통을 겪지도 않고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미래를 미리 체험하는 활동을 통해 현재의 공간을 더 넓힌다. 생산적 영원회귀의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마치 아이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어떤 재미 있는 일들로 시간을 채울 것인지에 흥분해 있지만 이 많은 흥미진진한 일을 채우기에 오늘의 시간은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안도감을 같이 경험한다.
지금 당장 생존을 위해서는 효율적 루틴도 필요하지만 시간에 대한 제대로된 연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루틴에 대한 도전과 탐구도 요구된다. 새로운 루틴에 대한 탐구가 죽은 세포를 폐기하고 새로운 삶을 만들어 젊음을 가져다주는 비결이다. 나이가 젊어도 지금까지 성공한 루틴만 따라간다면 애늙은이처럼 보이는 상황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계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죄목은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때우는 삶을 산 것이다.
시간을 때우는지 시간을 채우는지의 문제는 시간에 대한 태도이다. 시간을 떼우는 삶을 산 사람들은 시간의 신을 노하게 해서 시지프스의 형벌에 처해진다. 시간의 신은 차이를 반복하는 영원회귀의 삶을 통해 시간을 채운 사람들에게 시간을 축복으로 선물한다. 우리가 지금 취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점검해볼 시점이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 삶을 형벌로 채울 것인지 축복으로 채울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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