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 아시아 국가에 가면 목격할 수 있는 경제의 두 축을 구성하는 시장이 쌀 시장과 고무시장이다. 이 둘이 운영되는 거버넌스 구조는 천지차이다.

동남아 국가에서 쌀은 3모작 4모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쌀은 가격탄력성이 높다. 반면 고무나무를 길러서 고무를 생산하기까지는 적어도 4-5년이 걸리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가격탄력성이 떨어진다. 쌀 시장은 그냥 쌀의 품질에 따라 즉각적으로 가격이 책정된다. 농부가 쌀의 품질을 속이는 것도 불가능하다. 품질에 대한 불확실성이 없으니 흥정이라는 것도 없다. 가격흥정이 없는 경매와 비슷하게 스팟 거래가 이뤄진다. 품질에 따른 가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장거래가 거버넌스다.

고무시장은 다르다. 고무를 생산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고 좋은 고무를 생산하는 것도 태풍 등 기후에 따라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좋은 고무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고무농가와 고무가공업자들 사이에 시장가격을 넘어서 상대를 믿고 거래하는 장기적 신뢰가 필수적이다. 이들이 장기적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쓰는 거버넌스 전략이 "느즌한 계좌(lose account)"다. 실제로 고무시장에서는 농가가 태풍 등으로 큰 피해을 당했을 때 공급업자가 복구를 위해 자신의 현금 계좌를 대여해준다.

느즌한 계좌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한다면 "주머니 돈이 쌈지돈" 전략이다. 경제 공동체인 부부 사이에서는 남편이 돈이 내돈이고 부인의 돈이 남편의 돈인 것처럼 계좌를 터서 운영한다. 부부사이에 독자적 계좌를 가지고 서로가 상대에게 돈을 융통할 때 은행이자보다 비싼 이자를 요구한다면 굳이 가족을 만들어 경영하는 부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부부사이에 이런 공동계좌가 가능한 것은 부부관계라는 신뢰가 존재하고 이 신뢰를 통해 주머니 돈이 쌈지돈인 거래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서로간 신뢰가 깨져 이혼을 할 경우 가장 중요한 일이 그간 공동운영되고 있던 계좌의 잔고를 나누는 일이다.

100년 기업을 열망하고 있는 기업이 있다면 이 기업의 구성원과 경영진들은 어떤 방식으로 거래와 계좌를 운영해야 할까? 쌀 시장의 모형을 따라 모든 것을 품질에 따라 현금으로만 거래하는 방식이 적절할까? 아니면 고무시장 모형에 따라 신뢰가 지속된다는 가정하에 외상거래도 가능한 거래 모형을 택해야 할까? 아니면 둘 사이에 시너지가 나는 자신만의 하이브리드 모형을 만들어야 할까?

백년기업으로 성장하는 원리는 빙산에 비유해볼 수 있다. 종업원과 경영진간 노동기여에 대해 월급을 주는 현금거래는 빙산의 일각이다. 이런 현금거래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빙산의 일각을 떠받쳐주는 빙산의 밑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빙산의 밑둥을 받쳐주는 거래는 오랜 시간 공동체 구성원으로 같이 살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주머니돈이 쌈지돈처럼 운용되는 신용거래이다. 신용거래에 잔고가 충분한 회사만 경영 불확실성이 덮쳐 단기적 현금거래에 문제가 생겨도 여기에서 금액을 인출해서 거래를 충당하기 때문에 빙산이 침몰하지 않는다. 빙산이 침몰하지 않는 이유는 회사 구성원간 신용거래 계좌에 금액이 차 있기 때문이다. 이 신용계좌의 금액이 모두 인출되어 파산이 나면 빙산은 물속으로 가라 앉는다.

경영진이 구성원에게 현금을 결제해줄 때 기여대로 공정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경영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런 공정성 문제가 단순한 쉽게 고칠 수 있는 제도적인 문제를 넘어서 경영진에 대한 불신에 대해 구성원의 항의하는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빙산의 밑둥에 해당하는 신뢰계좌의 잔고가 바닦이 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신뢰잔고가 부도날 사태에 대비해 구성원들이 모두 은행에 찾아와서 자신의 돈을 현금으로 인출해달라고 항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을 쌀 시장에 맞춰 운영할 것인 고무시장에 맞춰 운영할 것인지 혹은 둘의 하이브리드로 운영해야 하는지는 경영진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특히 올해 대기업을 중심으로 제기된 성과급 등을 이슈로 제기된 문제의 본질에 대해 경영진들이 통찰이 요구된다. 구성원들이 제기하는 공정성에 대한 이슈의 본질을 경영진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것이 단순한 제도적 문제라면 큰 이슈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이슈 제기가 경영진과 구성원이 같이 운영하는 쌈지돈 운영에 대한 불신이라면 심각한 문제다.

성과급으로 촉발된 공정성의 이슈가 경영진이 쌀 시장의 장사꾼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에서 생긴 문제라면 이런 기업들이 100년 기업의 장기적 거래의 책무를 완성해 존경받는 백년기업으로 탄생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 것이다.

물론 한 가지 방식이 다른 방식을 제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성원도 본인들이 기여한 바에 따라 현금으로 계산해주는 월급이 있어야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쌀 시장에서 행해지는 현금거래는 기본이다. 문제는 이런 초단기적 성과에 대한 월급과 성과급으로 결제해주는 현금거래 방식만 존재하는 기업에서 100년 기업이라는 초장기적 거래를 전제로 한 거래방식을 충족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시장에 외주를 주는 방식과 비정규직으로 구성원을 채우는 방식으로 100년 기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 반대로 고무시장 모형에 따라 모든 구성원을 다 정규직으로 만들고 이들 정년을 보장하면 100년 기업이 완성되는 것일까? 정년과 장기계약을 빌미로 이들이 먼저 신뢰에 대한 서약을 져버리면 기업은 어떻게 될까?

한쪽이 일방적으로 신뢰에 대한 서약을 져버려 기업이 침몰하지 않게 하려면 기업의 정점 거버넌스를 구성하는 목적함수는 무엇이어야 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존경받는 100년 기업은 어떤 목적함수를 가지고 기업을 운용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