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대부분 신하들은 명분을 따랐다. 명에 대한 신의를 져버리고 오랑케인 청에 굴복하는 것은 사대부의 수치라는 명분 때문이다. 이들은 척화론으로 무장하고 인조를 압박했다. 척화론의 수장은 기개 있는 선비의 상징이었던 김상현이었다. 김상현은 기개 있게 싸우다 죽는 것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낫다고 나섰다.
척화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이 당시 이조판서 최명길이다. 최명길은 명분이 아무리 옳더라도 청나라에 대적해서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여서 결국 무고한 백성들만 다치게 하니 일단은 화친하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인조가 1636년 12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서 주화와 척화를 주장하는 논쟁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최명길이 다시 나섰다. 하지만 최명길이 청군 진영을 오가며 작성한 화친 조서를 김상현이 임금 앞에서 찢어버렸다. "사대부의 명망을 버리고 오랑케와 화친하는 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더 비굴하다"는 논지였다. 최명길이 다시 행동에 나섰다. "찢는 사람이 있으면 붙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최명길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청의 진영을 오가며 협상했다. 최명길을 지지하는 화친론자들의 조서에 따라 조선은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치루고 청은 물러간다.
이후에도 척화론자들은 틈만나면 삼전도 굴욕을 빌미로 최명길을 공격했다. 이때 비로서 최명길은 자신이 화친론을 주장했던 속내를 이야기한다. "모든 화살은 나에게 쏘라." "백성을 살리는 것이 내 임무였다."갖은 압박 속에서 자신의 의중을 표현한 것이다. 임금과 백성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아주 위험한 발언이다.
이 논란을 두고 사람들은 명분이냐 실리냐를 논한다. 최명길은 실리에서 이긴 사람이고 김상현은 명분에서 이긴 사람이라는 취지이다. 아주 잘못된 논지다. 실리와 명분은 그냥 이원론적 개념일 뿐이지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리는 명분에 의해서만 생명을 얻고 명분은 실리에 의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이들 이원론적 개념이 독자적으로 살아날 방법은 없다. 현실에서 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분과 실리가 서로 직각으로 결합되는 경우에만 제대로 살아남는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실리냐 명분이냐의 선택에 관한 문제보다 우리가 더 중대하게 따져 물어야 할 사안은 어떤 것이 제대로 된 명분이고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실리인지다. 최명길과 김상현 중 누가 더 제대로 된 명분과 실리를 가지고 있었을까? 명분이 제대로 된 명분인지를 판단하게 하는 기제가 목적과 긍휼이다.
김상현의 명분은 사대부의 기개와 임금을 살리는 것이다. 최명길의 명분은 백성을 살리는 것이다. 제대로 된 명분이란 그 명분 속에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한 이해와 이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 포함되어 있는지의 문제이다. 물론 사대부와 임금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힘없는 백성의 아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대부인 자신을 넘어 자신들보다 더 아파할 백성들의 아픔을 진정한 아픔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왜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을 때 목적이 제대로 선 명분이 된다. 자신보다 처지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의 아픔을 통감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행동화 된 이유만이 명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들의 자발적 행동을 얻어낸다.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진 최명길 같은 사람들은 명분을 쫒아가지 않는다. 이들을 행동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힘없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다. 아픔이 이들의 행동을 숨어서 추동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들에게 직접 목격하는 것은 행동이다. 이들 행동의 모티브 속에 숨겨진 것이 아픔이다. 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사람들이 다그치면 백성에 대한 아픔 때문이라고 설명하겠지만 이들은 이 설명이 굳이 명분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명분은 자신이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이 아픔을 향해 있는 것을 보고 이해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를 못느끼는 것이다. 이완용의 일제에 대한 항복문서와 최명길의 청에 대한 항복문서가 본질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누구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한 문서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명분을 가진 사람들은 행동으로 말하지 말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들이 해결해야 할 아픔이 중대하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행동이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굳이 말로 명분을 따라가지 않는 이유는 실제 명분이 자신을 뒤에서 밀어주는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동이 결여된 명분과 양심이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 명분과 양심 속에는 사람들의 아픔이 없다. 삶의 진실된 목적이 있다는 것은 나를 떠나 더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내 아픔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나만의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긍휼과 닿아 있지 못한 사명과 목적은 본질이 없는 텅빈 깡통일 뿐이다. 명분이 그냥 명분으로 끝나는 이유는 자신보다 더 아픈 사람들의 긍휼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초연결 디지털 시대에도 명분과 실리의 이원론으로 논쟁을 주도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면 이들은 전형적 유사리더들이다. 내 개인적 견해는 최명길만이 진성리더이자 제대로 된 명분을 갖춘 실리론자였다. 최명길이 지금 시급하게 필요한 진성 정치인 모범적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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