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을 직역하면 "흰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라는 뜻이지만 의역하면 "본질이 있어야 꾸밈도 의미가 있다"라는 뜻이다. 더 쉽게 의역하면 앙꼬가 빠진 찐빵을 더 찐빵처럼 포장해서 판다고 해도 찐빵을 파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이다.

간디는 사회가 혼탁해지는 이유를 회사후소에서 찾았다. 56살이 되던 1925년 간디는 '청년 인도'라는 잡지에 '사회를 병들게 하는 7대 사회악'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다. 7대 사회악은 모두 본질이 빠진 화려한 외양만 있는 제도를 의미한다.

▲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 땀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 인격 없는 교육(Knowledge without character),

▲ 도덕성 없는 장사(Commerce without morality),

▲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 희생 없는 신앙(Worship without sacrifice) 등이다.

간디는 종교의 본질을 희생이라고 생각했지만 희생은 자신의 아픔과 남을 아픔을 아픔으로 용기 있게 인정하고 행동을 통해 치유하려는 긍휼(Compassion)이 발현된 것이다.

종교의 기원을 연구한 비교종교학자 케렌 암스트롱은 이 점에서 모든 정통 종교의 본질은 긍휼감 (Compassion)이라고 규정한다. 긍휼이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고통받는 이를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연대를 발동시키는 도덕적 감정이다. 암스트롱은 긍휼은 동서고금 거의 모든 정통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이라 주장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긍휼(compassion)이라는 단어로 아픔을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치유하려는 개념을 드러낸다. 불의한 고통에 공감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명령한다. “너희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의 말은 이 전통을 대표한다.

불교와 힌두교에서 Compassion은 자비(karuṇā)로 명명된다. 모든 존재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수행과 해탈의 토대다. 도교와 유교에서도 Compassion은 상선약수와 측은지심으로 번역된다. 맹자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달려가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라며 측은지심을 인간 존재의 출발선으로 규정했다.

이렇듯 종교는 그 뿌리에서 아픈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실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는 어떤가? 종교가 약자를 품는 대신, 약자를 선별하고, 배제하고, 심지어 차별을 정당화 하고 약자를 희화화 하는 현실을 마주한다.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긍휼은 사라지고, 이들,을 희생양 삼아 악마로 정죄하는 일이 본분인 것처럼 착각한다.

케렌 암스트롱이 말한 ‘신앙 없는 종교’란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신앙 없는 종교는 신은 믿되 긍휼은 잃어버린 종교를 의미한다. 아픈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악마화에 앞장 서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신도를 가지고 있어도 신앙을 상실한 종교의 표상이다. 오래 전 마르크스는 종교의 지나친 율법과 의례가 바로 이런 신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왜곡은 종교가 본래의 존재 목적을 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 종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상태, 혹은 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해 왔다. 존재목적의 내용은 달라도 방향성은 같다.

불교는 모든 이가 부처가 되는 상태를 통해 열반에 이르기를 바란다. 부처의 보통 명사화가 존재이유다. 자비는 그 수행의 핵심 동력이다. 기독교, 이스람교, 유대교는 공의(justice)가 실현된 세상, 즉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한다는 존재목적을 가지고 있다. 약자에 대한 긍휼이 바로 그 조건이다. 힌두교는 업(karma)의 사슬을 끊고 해탈(moksha)의 초월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존재이유다. 자비는 그 깨달음의 전제다. 유교는 인의예지신이 실현된 군자들로 구성된 도덕 공동체를 존재이유로 삼는다. 그 시작은 측은지심이라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신뢰다. 도교는 모두가 자율적이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살아가는 ‘모두가 주인 되는 사회’를 꿈꾼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지 않는 물처럼 자연스런 조화 속에서 약자에 대한 치유는 상선약수로 작용한다.

결국 이 모든 종교의 최종 목적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은 사회와 긍휼을 실천할 근력이 있는 구성원을 키우는데 있다. 각기 다른 신학과 철학을 말하지만, 모든 정통종교는 고통 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삶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려는 존재목적의 방향성을 공유한다.

대한민국에 전광훈과 손현보 신드롬은 우리가 얼마나 신앙 없는 종교에 빠져 있었는지를 각성시켜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기독교도 신자유주의 성장주의에 경도되어 경쟁과 자본을 등에 업고 긍휼 없는 신앙에 익숙해졌다. 이름뿐인 하나님, 형식적인 예배는 있어도, 눈물 흘리는 이웃을 향한 따뜻한 손길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신앙 없는 종교란 긍휼 없는 죽은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긍휼이 전제 되었을 때 믿음으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한다. 진정한 아픈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상실한 지금의 제도화된 종교를 더 이상 종교라 부를 수 없는 이유다. 이단이 종교의 존재 이유가 불분명한 단체라면 신앙없는 종교는 긍휼을 상실한 한 유사신앙이다.

종교가 다시 빛을 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 교리도, 더 많은 신도도 아니다. 고통 앞에서 무릎 꿇을 줄 아는 마음, 곁에 앉아 함께 울 수 있는 마음, 고통을 치유해 온전한 삶의 주인으로 세우려는 마음인 긍휼의 복원만이 종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을 것이다. 신현보와 전광훈의 등장은 대한민국 기독교를 신앙과 긍휼로 다시 살려내라는 반면교사를 위한 경고이자 각성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