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공신력이 높은 신뢰지수 조사 기관인 에델만이 2025년의 각국에 대한 신뢰지수 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은 조사 대상국 28개 국가 중 신뢰지수가 41점으로 27위다. 신뢰지수는 100점 만점으로 60점 이상이 신뢰 사회, 50점 이상이 보통, 50점 이하가 불신국가다. 2025년 대한민국 신뢰의 현주소는 말그대로 불신지옥인 셈이다.

신뢰는 거래에서 손해를 감내하고 개인적으로 상대에게 어음을 발행해 줄 개연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천 만원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을 때 못 받을 것을 각오하고 빌려준다면 신뢰잔고는 천 만원이다. 나도 친구에게 천 만원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는데 친구가 못 받을 각오하고 천 만원을 빌려주었다면 우리 사이의 신뢰잔고는 2천만원으로 뛴다. 서로 오백만원만 빌려주었다면 신뢰잔고는 천만원으로 줄어든다.

신뢰잔고는 현금이 고갈되어 파산 났을 때 상대의 잔고를 끌어 쓸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보험이다. 신뢰 잔고가 있기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위험을 감수해가며 혁신을 위한 행위를 감내할 수 있다. 신뢰잔고가 0원이라면 모든 것을 현금으로 해결해야 한다. 현금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혁신적이어도 혁신을 실행할 수 없다. 현금만 따지는 사람들이 많으면 현금을 가진 사람들도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 결국 미래를 위한 실험에 가담할 수 없고 결국 미래를 포기해야 한다. 사회적 신뢰 잔고가 떨어지면 모든 사람들이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손해 볼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한다. 신뢰가 파산난 사회의 특징은 계산기 두드리기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이렇게 신뢰 파산 국가가 되었을까?

사회적 신뢰는 대부분 세 과정을 통해 파산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 원리에 따라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은 무조건 공정하다고 생각한다. 무한 경쟁을 강화하고 제로섬 개념에 입각해 경쟁해서 이기는 사람들이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을 공정하다고 믿어가며 경쟁을 부추긴다. 이들의 순진한 논리와는 달리 시장은 반복적 게임으로 이어지고 초기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이긴 자원을 기반으로 다음 게임에서도 이길 개연성을 키운다. 공정성은 첫 게임에 적용되었을 때만 작동한다. 이후 게임에도 같은 공정성을 주장한다면 불공정한 결과를 세탁하는 과정일 뿐이다. 반복게임에서는 공정성이 불공정의 식탁이다. 초기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몇 십 미터 앞에서 100m 계주를 반복하는 자신들의 행동도 모든 사람들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경기를 치러서 얻었기 때문에 지극히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불공정한 게임이 지속되면 사회는 양극화로 분열되기 시작한다. 가진자들은 가진 것을 기반으로 건물주가 되어 안정적 임대료로 먹고 사는 것을 꿈꾼다. 양극화 사회는 필연적으로 랜트 시킹(Rent Seeking) 사회로 전락한다.

반복적 게임을 통해 승자인 소수가 대부분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독점한다. 상위 10% 사람들이 부, 지위, 명예의 대부분을 독점한다. 이들은 획득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산으로 자신만의 건물을 세우고 이 건물에 세입자를 들여 임대수익을 챙겨가며 자신의 지위를 가족에게 대대손손 상속한다. 모두가 건물주를 꿈꾸는 사회에서는 위험을 감당해가며 미래의 혁신을 위해 나서는 사람들이 가장 우둔한 사람으로 치부된다. 이런 부모의 열망을 아는 머리 좋은 젊은이들은 공대보다는 법전원이나 의대로 향한다. 우리 사회의 법전원, 의대 열풍은 젊은이들이 건물주 꿈에 장악 당한 결과다.

사회를 이끄는 드라이버가 미래의 가치가 아니라 공정성이라면 이미 신뢰파산 사회의 두 번째 단계까지 돌입한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랜트 시킹을 통해 부와 명예를 대대손손 물려주려는 기도가 실패로 끝나는 단계다. 이유는 건물에 들어와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부도나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부를 독점한 상위층도 생태계가 붕괴되어 산성화되면 결국 남아 있는 10%라도 먹기 위해 다시 행동에 나선다. 뱀이 배가 고프면 비현실적으로 자신의 꼬리를 먹는 우로보러스 현상이다. 신뢰 시스템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마지막 단계인 우로보러스 단계에 진입하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살기 위해 반드시 이겨야할 적으로 간주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전개되고 사회는 붕괴된다.

이번 조사를 보면 국민의 46%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우로보러스가 되어 남을 공격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트리거나, 폭력으로 위협하거나, 공공 또는 사유재산을 훼손하는 것도 불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한다. 특히 2030에서는 이 비율이 52%를 넘는다. 서부법원 폭동과 혐오의 아이콘 이준석이 활개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이들의 준동은 우리 사회의 신뢰가 이미 어른들에 의해 파산선고된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신뢰를 통해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쇄빙선의 역할을 해야 하는 기업과 기업주에 대한 신뢰도는 더 심각하다. 48점으로 28개국 중 꼴찌다. 국민 대다수는 기업이 기관 중에는 가장 유능하고 똑똑하지만 유능함을 오직 기업소유주의 이윤을 극대화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은 기업이 기업이윤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성만을 고수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ESG나 DEI는 그냥 사탕발림의 약속이고 지금 당장 손해 보는 것을 가장 꺼려하며 항상 계산기를 두드리는 계산의 선두가 기업이라고 생각한다. 고객과 일반의 이런 인식이 기업에 대한 낮은 신뢰지수와 반기업정서를 키웠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의 신뢰의 회복은 많이 가진 엘리트들이 더 내려놓고 태어날 미래 세대와 사회의 번성을 위한 사회적 계약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신뢰는 손해 볼 개연성을 인정하는 행위인데 내려놓고 희생할 것이 없는 서민들이 내려 놓아봐야 효과성이 있을 수 없다. 한 때 조국혁신당의 조국대표가 큰 논란에 휩싸였던 이유도 내려 놓음을 외치던 사람이 내밀하게는 자신의 가족을 더 챙기는 모습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내려놓음조차 연기였다는 진보 정치 기대주에 대한 극심한 배신감이 나라를 오랫동안 요동치게 만들었다.

엘리트가 먼저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계산기를 내려 놓는 모습이 부활의 시작이다. 내려놓음이 연기가 아니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살려내기 위한 진정성 있는 희생으로 인식될 때 우리나라 신뢰잔고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살아난다면 당연히 기업도 이에 부응해 미래 가치 창출에 나설 것이다. 가장 유능한 기업들이 앞장서서 반기업 정서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위해 넘어지고 일어서는 오뚜기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측은지심을 일으킬 수 있다면 대한민국이 선진 시민국가로 진입할 희망은 여전히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