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1-20 10:50
[N.Learning] 선지자와 주술가의 차이는? 이사야 41장 다시 읽기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021  
선지자와 주술가의 차이는?
이사야 41장 다시 읽기
대한민국은 경기가 L자 경기로 무너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의 구름이 덮치자 경기가 좋을 때 신봉했던 신자유주의 단기적 경쟁과 결과 중심주의에 잠시 눈이 멀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등장한 인물이 장님무사 어깨 위에 앉아 무사를 조종하는 앉은뱅이 주술사다. 앉은뱅이 주술사는 명태균, 천공, 건진, 노상원 보살을 좌우에 거느리고 나라를 파탄에 이르게 한 주범 김건희를 지칭한다. 장님 무사는 검찰공화국과 검찰공화국의 수장 윤석열을 의미한다.
온도와 설탕물만 있으면 반드시 등장하는 진드기처럼 나라가 어수선해져서 불안과 불확실성에 휩싸이기 시작하면 주술사와 사기꾼이 반드시 등장한다. 주술사와 사짜에게는 불안이나 공포가 큰 사업 기회다. 이들은 불안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장사하는 파렴치한 장사꾼들이다. 이들 주술가나 사짜들이 사업의 기반인 불안을 조장해 자신들이 파는 부적을 사지 않으면 물리적 죽음에 도달한다고 경고한다. 이런 주술사들과 사짜들에 의해 불안이 부풀려지면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을 상식적으로 볼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을 잃는다. 세상을 제대로 읽은 눈을 상실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장님으로 전락한다. 권력을 이용한 조작에 눈이 멀고 오래전에 삶의 존재목적을 잃었던 윤석열이 먼저 먹잇감이 되었지만 우리 누구도 삶의 목적을 잃고 헤매는 한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권력을 등에 업은 주술사가 통치하는 나라는 나름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선진 대한민국이라고 굳게 믿었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현실이 되었다. 똑똑하다고 동네방네 떠들었던 대한민국이 하루 아침에 국제사회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국제사회가 보는 대한민국은 사실 헛똑똑였다.
윤석열 정권에서 예지력이 있다고 자신들끼리는 믿지만 예지력이라고는 1도 없는 주술사와 성경에 등장하는 진짜 예지력을 가진 선지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외견 상 보이는 가장 드러나는 차이는 자기 성찰력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다. 주술사들은 남들의 운명을 예언해주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한 치 앞 미래를 성찰하거나 예측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예측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선에서 비극적으로 끝난다. 선지자는 자신의 운명 뿐 아니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도 정확하게 예언한다. 주술가들의 존재이유는 불확실성과 불안을 싫어하는 성향을 빌미로 남들의 운명을 예언해줌에 의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선지자는 자신의 생존을 넘어 공의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길에 대한 예언을 주로한다.
세상은 극단적 부침이 있기 마련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공의를 실현하는 쪽으로 우상향의 그래프를 그리고 있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공의에 바탕을 둔 선지자의 예언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맞을 수 밖에 없는 참이다. 반면 주술가의 예언은 특정 시점 내부정보를 이용한 주가에 대한 예측처럼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잘못된 예측으로 끝난다. 주술사는 불안을 이용해 자신의 부적을 팔아 생계를 챙기는 사람이다. 주술사의 예언은 틀릴 수 밖에 없고 이것을 깨달은 순간 사람들은 이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김건희처럼 통 큰 주술사는 대단위 폰지 사기범들이다. 이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일반 사람들이 감내하기 힘든 큰 고통의 쓰나미가 불어 닥친다.
대한민국은 어떻게 하다 주술사가 지배하는 나라로 전락했을까? 이사야 41장에 이런 경우에 처한 나라들에 대한 원인 분석과 처방이 나와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고의 선지자는 이사야다. 이사야 41장을 보면 이사야는 남유다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잃어버리고 주술사와 사기꾼의 고혹적인 유혹에 끌려 다니면 멸망할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되살려 공의로운 목적에 대해 회심하면 다시 살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한 마디도 정리하면 목적을 잃은 삶을 살기 시작하는 순간 모두가 길을 잃고 혼돈과 환란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이 와중에도 공동체가 공의의 길을 찾아 나서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음을 예언한다. 주술가들이 판치는 세상은 구성원 대부분이 자신의 존재목적을 잃고 혼동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때 느끼는 공포와 불안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경우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주술가들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부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고 사기행각을 벌인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아서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나아갈 때는 주술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이 주술국가가 된 이유는 니체도 예언하고 있듯이 우리가 우리 삶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탈로한 삶에 상당히 오랜 기간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김건희와 같은 주술가가 득세하게 만든 것은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답으로 믿고 지향해왔던 삶이 이들이 풍성해지는 토양을 제공했다.
이사야 41장 10절부터 13절에는 주술사들의 사업기반인 두려움에 대해 언급된다. 한 치 앞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지금 가진 조그만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작은 두려움에 집착하다 결국은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을 직면하는 두려움을 언급한다. 이사야는 죽음이라는 큰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고 큰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공의로운 목적을 가져와 지금 현재 신실하게 실현하고 이런 실현을 통해 작은 두려움을 제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서 주술가들의 먹잇감이 되는 운명에서 해방된다고 설명한다. 주술가들이 사업하는 방식은 목적을 잃고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이들이 경험하는 작은 두려움을 더 크게 증폭시키는 방식이다.
14절에서 이사야는 삶의 목적을 잃고 일상의 불안을 잊기 위해 순간적 향락에 취해 비틀거리며 주술가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렁이에 비유한다. 지렁이는 시궁창이나 진흙 속에 살고, 선천적으로 암흑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뼈대가 없다. 목적을 잃고 불안에 떨고 있던 와중에 주술에 취해 주술가에게 나라를 넘겨주었던 대한민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15절, 16절에는 삶의 목적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면 그 믿음으로 지렁이를 날 선 탈곡기로 만들어 주술가들이 남발했던 부적을 거세게 날려 가루로 흩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예언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주술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주술 내란 세력에 동조해가며 객기를 부리고 있는 국힘당 국회의원들에 대한 경고로 들린다.
19절과 20절에는 주술가들에 의해 산성화되고 결국은 사막으로 변한 땅에 올리브 나무, 전나무, 느티나무, 회양목을 함께 심으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죽음과 먼저 직면해서 얻어낸 각자의 삶의 존재목적을 나무로 심어 숲을 가꾸면 어느 날 이스라엘은 다시 풍성한 과수원과 산소가 펑펑 품어져 나오는 비옥한 나라로 복원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사야를 소환해서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한 조언을 듣는다면 같은 조언을 할 것이다. 개인, 사회, 국가, 조직의 잃어버린 존재목적을 현재로 가져와서 다양한 과실과 다양한 나무를 품은 풍성한 숲으로 가꾼다는 꿈을 가지고 묘목을 심는 농부의 땀과 헌신을 주문할 것이다. 산소가 펑펑 품어져 나오는 대한민국의 숲을 주문할 것이다.
주술가와 선지자의 차이는 목적에 대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 아니면 욕망으로 만든 부적인 장미빛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왜곡해서 보게 하는지의 차이다. 목적에 대한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선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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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 교회의 주일 설교에서 최근에 발매된 <급진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 (잉걸북스 신승철)>가 설교 내용으로 인용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급진거북이 2장에 나오는 근원적 변화의 동학인 큰 두려움과 작은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와 9장 존재목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선승구전 이야기다. 사는 것에 바빠 믿음을 잃고 기진맥진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읽고 믿음을 복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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