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가 얼마나 성숙할 수 있을까?
색안경을 벗고 비전의 안경을 쓰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얼굴 앞면만 보지만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 사람의 뒷통수까지도 본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내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본다. 이런 사람들은 무슨 능력 때문에 이런 신과 같은 통찰력과 독심술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Bracketing 능력 때문이다. Bracketing은 현상학적 용어로 현상의 실체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의식의 본능적 흐름에 브레이크를 걸어 <판단중지>를 하고 메타인지를 가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체를 제대로 볼 때까지 주관적으로 본 것을 괄호로 묶어 놓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Bracketing이라고 칭한다. 부분으로 본 것이 곧 바로 믿음으로 굳어지기 전에 판단을 중지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편견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게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내 뒷모습까지 항상 보고 사는 가족과는 달리 주로 서로 얼굴을 맛대고 대면적으로 살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을 보고 판단을 내린다. 판단을 내린 순간 상대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진다. 상대는 내가 앞 모습만 보고 판단을 내린 대로 각색되어 나에게 제시된다.
하지만 내 뒷통수까지를 알고 있는 가족의 비밀을 띁어보자. 가족도 대부분은 내 앞 모습과 대면하면서 나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만 같이 살다보니 어떤 경우는 내 옆모습도 본다. 내 뒷모습도 본다. 가족이 찾아낸 내 뒷 모습이 앞 모습과 너무 다르면 우리의 인식은 앞모습을 기반으로 파악해 낸 나에 대한 이해에 판단중지 명령을 내린다. 판단중지 명령을 받은 나는 다시 옆모습도 좌우 모습도 관찰해가며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메타인지 과정을 작동한다. 결국 가족이 나를 통체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앞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에 판단중지 명령을 내리고 나를 N개의 각도에서 보고 이것들을 종합하는 메타인지 과정을 통해 나의 전체적 실체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도 판단중지 명령을 거부하고 앞 모습만 보고 나를 이해했다면 나는 일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다른 모습은 아니다. 가족은 나의 앞모습을 보지만 앞 모습을 봐가며 내 뒤통수까지 볼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림은 장님들이 코끼리를 대면해서 코끼리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다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판단중지이다. 코를 만지고 코끼리는 코라고 주장하고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다리라고 주장한다면 코끼리의 실체는 절대로 파악될 수 없다. 특히 다리를 만진 장님이 권세를 누리고 있는 장님이어서 다리가 코끼리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상황은 더욱 꼬인다.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서는 힘 있는 장님이 본 방식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진다.
다른 부분을 만진 장님들이 자신이 본 것이 전체라는 주장에 대해서 판단중지를 하고 다른 장님들이 만진 것들에 대해 귀를 기울여서 메타인지 과정을 작동시킬 때 코끼리는 제 모습을 드러낸다. UX 디자이너들이 사용자 경험의 실체를 파악할 때도 Bracketing을 사용한다. 또한 일상을 판단중지하고 밖에서 보게하는 여행도 대표적인 Bracketing활동이다. 판단중지만이 편견의 색안경을 끼고 상황을 왜곡하는 것을 막아준다.
비판사회철학자 하버머스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담론을 진행할 때 담론이 이상적이고 민주적 담론이 되는 상황의 전제조건을 판단중지로 규정했다. 우리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본 것만을 통해서 세상을 주장하는 것임으로 모두가 장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판단중지에 나설 때 민주적 담론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담론상황에 권력이나 지위가 개입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 담론상황의 핵심이다. 편견과 권력에 대한 판단중지가 전제될 때만 다른 사람이 본 것을 자신이 본 것과 종합해서 전체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을 획득하는 것이다. 민속방법론에서는 참여하는 개인들의 자신들이 본 것이 주관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주간성을 인정하는 간주간성이 현상을 가장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판단중지만 제대로 한다면 이상적 담론상황이 만들어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버머스가 놓치고 있는 것은 이상적 담론이 놓여 있는 역사적이고 시간적 맥락이다. 현재 자신이 본 것들에 판단중지를 넘어서 가야하는 미래의 방향에 대해 합의가 없다면 실체를 파악하고도 논의는 비생산적으로 공전된다.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가는 이유이다. 다양한 사공들이 판단중지를 하고 운항에 대한 총체적 전문성을 획득하지만 이들의 배는 산으로 간다. 가는 방향에 대한 비전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비전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인 목적에 대한 믿음과 철학을 획득했을 때 못보던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목적은 실현된 것이 아닌 실현을 위해 가야할 방향성이다. 목적에 대한 믿음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만이 미래에 가야할 방향을 제대로 본다.
결국 우리나라가 성숙한 민주사회로 성숙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색안경을 끼고 주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Bracketing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블래캐팅한다는 것은 자신이 장님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자신이 본 것이 색안경을 끼고 본 채색된 세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판단중지이다. 이런 판단중지가 전제될 때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받아들여 전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 만들어진다.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무슨 <빠>나 무슨 <부대>는자신이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집단이다. 둘째는 이런 판단중지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들이 향하고 있는 미래의 방향에 대해서 깨우침을 주게 할 수 있는 비전이다. 이 비전은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인 목적을 각성하고 목적에 대한 믿음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만 제시할 수 있다. 판단중지가 가능한 성숙한 시민들이 모였다해도 이런 비전이 공유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배는 미래가 아닌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쓴 편견의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남들이 본 세상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고 이를 통해 가려는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비전의 안경>을 찾는 나라가 제대로 된 민주국가이자 미래를 이끄는 성숙한 시민국가이다.
사법개혁만큼 미진한 정치개혁이 이번 총선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정치개혁의 물꼬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후보가 빠 혹은 부대 뒤에 숨어서 <편견의 색안경>을 벗지 못하는지 이런 후보들에 대항에 어느 후보가 제대로 된 <비전의 안경>을 끼고 미래를 보는지를 찾는 것이 관건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