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나이듬이 무기가 아닌 세상
나이와 전쟁과의 상관관계
100세의 일기로 지난 4일 별세한 백선엽 장군은 박정희 장군과 마찬가지로 일본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백선엽 장군은 간도특설대의 주임무인 독립군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수행했다는 주홍글씨가 평생을 괴롭혔다. 역사적 공과에 대한 평가는 이분이 돌아가셨으니 전문가인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전쟁 당시 장군의 임무를 수행했던 분들의 나이에 관한 이슈이다.
나이 문제는 대한민국 기업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우리나라의 HR 시스템은 그간 수도 없이 개혁을 거듭해왔지만 지금까지도 건드리지 못하는 HR 시스템은 보상과 직책을 근속연수 즉 나이에 따라 결정하는 연공제에 관한 문제이다. 직무급제를 실시하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 연공제가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농업사회에서 현능함을 결정해주었던 가장 중요한 변수였지만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가장 큰 장애이다. 연로하신 분들에게 공과에 대한 예우와 존경과 보살핌은 당연한 것이지만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데 중요한 예측변수는 아니다.
나이가 이런 비난을 완벽하게 넘어서 나이 다양성이 구현되는 조건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이다.
백선엽 장군은 전쟁 중이던 1953년 1월 4성장군으로 진급했다. 이때 나이가 33세이다. 대장으로 진급된 것은 모두 전공 때문이다. 6.25 전쟁 중 흥남철수로 많은 민간인과 군인을 구해내서 전쟁의 위인으로 알려진 김백일 소장은 그당시 나이가 37이다. 정의감과 인간미를 겸비했던 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수도경비사령관 이용문 장군도 당시 나이가 36이다.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종오 장군도 백마고지 승리를 이끌었을 때 사단장으로 나이가 31이다.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송요찬 중장도 전쟁이 끝날 때 나이가 35이다. 영천전투의 영웅인 이성가 장군이 8군단장으로 영천전투를 할 때 나이도 29이다. 육해공군 총사령관이었던 정일권 중장은 그당시 나이가 39이다. 삼대장 시대를 열었던 이형근 장군이 대장이 되었을 때 나이는 34살이다. 귀신잡는 해병을 창설한 김성은 3성제독은 전쟁시 나이가 26이다.
물론 나이든 장군들과 영관장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나이에 전공을 세우고 장군으로 진급한 사람이 무지기 수로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설명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쟁시에는 사명자체가 명료했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전투에 승리함을 통해 삶에 기여하는 것이 사명이고 이 사명을 달성했는지는 전공을 세웠는지에 의해서만 명료하게 평가된다.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들은 한결같이 전쟁으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역사를 살려내야 한다는 사명을 자신의 임무로 실현시키고 있었다. 이런 막중한 사명을 위해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일정 기간 시간을 기다렸다가 승진시키는 시스템이 아니라 전공이 평가되는 그 즉시 승진했고 승진 즉시 더 어려운 임무가 할당되었다. 사명을 달성했는지가 평가의 절대적 기준이었다. 사명 앞에서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이 만들어낸 전사에 참여한 병사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이들이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전략이나 나이를 넘어서 인간미였다. 나이가 든 영관장교들도 전쟁에서의 승리라는 막중한 임무를 실현하기위해 인간미를 발휘하는 이들을 보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사명을 실현했을 것이고 굳이 자신의 나이를 거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명의 죽음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역기능의 단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명이 사라지니 부수적이고 수단적으로 중요했던 것들이 오히려 더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는 디커플링이 만연해졌다. 또한 이 디커플링을 기반으로 생존을 유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철밥통을 만들어내고 이 철밥통의 세습을 지키기 위해 조직정치를 난무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발발해야만 사명이 분명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자신과 싸워서 이기거나 변화 자체와 싸워 이기는 것이 더 큰 전쟁이다. 엄현히 다른 의미의 치열한 전쟁에 몰입했음에도 전쟁 중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보랏빛 색안경이 문제다. 제대로 된 경영자와 리더라면 전쟁이 아니더라도 사명을 살려내고 이 사명을 달성하는 것에 모든 자원들을 최적화 시키는 일을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각성된 리더만이 자신의 조직과 자신의 회사를 생존의 문제를 넘어서 존재이유가 명확하게 규명된 존재우위라는 경쟁력을 확보한 회사로 변화시킨다. 초연결디지털 시대의 제대로 된 리더는 기업의 고전적 경쟁우위를 넘어 경쟁우위를 반드시 달성해야하는 이유인 존재우위까지 실현하는 것을 기업의 사명으로 생각한다.
나이 젊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사명의 달성에 나이의 많고 적음이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아서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사명을 위해 협업할 수 있는 세상을 주장하는 것이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라는 한 가지 잣대가 더 이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획일적 잣대로 작용하지 않는 세상이 바로 나이 다양성이 구현된 세상이라는 주장이다. 젊음이나 나이듬이 더 이상 무기로 사용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연공제의 물귀신에 발목이 잡혀 조직이 어려워짐에도 나이의 다양성을 구현하지 못하는 근본적 이유도 따지고 보면 사명의 죽음에 있다. 사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