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부했지만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학습하지 못한 죄인 얼마 전 학원을 운영하는 학원장 학습 모임에 초대 받아 이분들과 공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학원은 정해진 답을 빠르고 틀리지 않게 쓰는 방식을 가르치는 정답 공장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학습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지고 고차원의 학습을 실험하는 장으로 자신의 학원을 운영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랬다. 모든 학원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원이 학교보다 한 발 앞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습의 본질은 정답이 있는 지와 정답이 없는 지에 따라 일원학습(Single Loop Learning)과 이원학습(Double Loop Learning)으로 나눠진다. 또한 정답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더 나은 정답을 만들어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삼원학습(Triple Loop Learning)이라고 부른다. 일원학습은 정답이 있는 세상에서의 학습이다. 세상은 정답이 있는 학습을 기반으로 구성된 현실이 대부분이다. 수학 문제는 그 자체로 진리를 포함한 것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어서 대부분 답이 있는 세상을 가르친다. 역사적 진실도 학교에서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에서는 수학을 표준으로 사회인문과학에서는 역사를 표준으로 삼아 다른 연관 과학도 모두 답이 있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정답을 가르친다. 정답이 없다면 채점이 불가능하고 주관적이어서 교육과정에 학생들을 경쟁시킬 수 없기 때문에 답이 없어도 답이 있는 것처럼 가정하고 가르친다. 답이 정해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학습자는 답에 대한 뛰어난 암기력을 가진 학생들이다. 일원학습 세상에서 실수는 암기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실수를 암기하지 못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고 결국 점수는 점점 떨어진다. 혹자는 논리의 토대를 가르치는 수학도 암기로 승부하라고 가르친다. 암기를 통해 수능에서 최고점을 얻은 학생들을 인터뷰하면 스토리가 비슷하다. "교과서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업에 충실하게 임해서 공부했어요." 우리나라의 초, 중, 고, 대학 교육은 지금까지 대부분 답이 있다는 가정 아래 실수하지 않고 답을 쓰는 일원학습의 훈련장이었다. 암기력이 뛰어난 학생들이 시험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이들이 시험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 회계사, 의사, 교수, 전문가가 되어 지금의 지배계층을 형성했다. 이들 전문직의 직업 특성도 답이 있는 세상의 조밀한 규칙(법, 회계, 생명과학)을 운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회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이미 실수와 실패를 통해 답을 만들었던 선진국이 했던 실수를 범하지 않고 이들의 수준에 도달하는 벤치마킹이 학습방법이었다. 벤치마킹은 답을 실수하지 않고 배우는 기업의 학습역량을 의미한다. 이런 벤치마킹이 학습의 표준이었을 때 회사는 직원들에게 머리는 회사 문에 걸어 놓고 오고 회사에 와서는 그냥 시키는 답대로 일하라고 강요했다. 회사는 실수하지 않고 벤치마킹을 잘하기 위해서는 일류 대학에서 실수하지 않고 답을 내는 일원학습을 잘 훈련받은 직원을 뽑아서 벤치마킹의 일을 시키는 것이 최고의 전략이었다. 학교의 교육과 기업의 요구가 맞아 떨어졌던 시대가 있었다. 문제는 변화다. 세상이 변화하면 과거의 답은 대부분 작동하지 않는다. 변화에 의해서 과거의 답이 대부분 정답이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국면에서 필요한 학습이 이원학습이다. 이원학습은 정답으로 생각하며 모아왔던 정답 모음인 암묵적 정신모형의 가정을 수정하는 학습이다. 정신모형의 암묵적 가정을 수정해서 현실에 맞는 가정으로 대체하는 작업인 이원학습은 기존의 가정이 맞다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실수와 실패에 새로운 답의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이다. 이 실패와 실수에 대한 진솔한 피드백을 통해 실수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낡은 가정을 수정하는 학습이 이원학습이다. 문제는 낡은 가정을 고치는 것이 지금까지 많은 답을 제공했던 암묵적 정신모형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실수를 숨기고 남에게 떠넘겨가며 꼬리자르는 방식을 통해 자기 정신모형을 지키는 반 이원학습의 옹호자가 된다. 결국 이들은 일원학습을 통해 얻었던 과거의 영광을 끊어진 공테이프처럼 반복해가며 현재의 세상에서 잊혀지고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일원학습을 벗어나지 못해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일을 시킬 쓸만한 사람이 없다고 불평한다. 자신의 암묵적 정신모형이 담고 있는 낡은 가정이 가져온 실수를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하나씩 고쳐나가는 작업은 지난한 작업이다. 현재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변화이기는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사방팔방에서 몰려오는 더 답 없는 미래가 가져오는 불안을 이원학습으로 극복하기는 힘들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원학습이란 학교 공부를 끝내고 세상에 나와 세상의 문제를 직면하는 국면에 시급하게 문제가 되는데 이때는 이미 암묵적 정신모형을 의미하는 뇌의 신경망 구조에 대한 네트워크가 거의 완성된 시기여서 암기력으로 승부했던 헛똑똑이들이 머리 좋고 게으른 뇌와의 실전에서 뇌를 이기기는 힘들다. 뇌가소성이란 말은 뇌의 신경망 지도인 정신모형 지도가 완성된 성인에게는 과장된 희망의 메시지다. 삼원학습(Triple Loop Learning)은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결국 삶아 죽는 개구리가 되어 어느 시점에는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절대절명의 의기의식이 계기가 된다. 잘못된 정신모형의 가정 때문에 실제 죽을 뻔 했다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학습 방법이 삼원학습이다. 죽음의 징조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실제 죽는 시점을 계기로 떳떳하게 죽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각성된 죽음을 계기로 삶의 개입이 끝나는 죽음에서 현재까지 도달하는 지도를 선제적으로 그려내고 이 지도에 근거해서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암묵적 정신모형의 실체를 파악하고 새로운 정신모형과 낡은 정신모형의 갭을 줄이는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진성리더십에서는 이런 학습을 삼원학습이라고 부른다. 삼원학습이 이미 굳어진 정신모형인 뇌가소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과 관련한 절대절명의 문제에 대한 각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계기로 죽음을 미리 맛보는 체험은 삼원학습을 위한 축복이다. 삼원학습은 점진적 변화가 아니라 각성사건이나 고난사건 등 사건으로 찾아온다. 삼원학습에 따르면 성인들이 뇌가소성을 이기고 학습할 수 있는 것은 사건을 통해서다. 삼원학습에 돌입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새로운 답이 제시되고 이 답이 실현되어 더 높은 곳에 더 평평한 세상이라는 답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미래의 가치와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직 삼원학습이다. 답이 있는 세상에 뛰어난 학습자였던 대한민국이 답이 없는 세상에서 학습지진아로 전락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교육 커리큘럼은 근원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답이 있는 세상을 가르치는 것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고등학교에서는 실수를 통해 새 답을 찾아가는 이원학습과 미래를 위해 선제적으로 답을 제시하고 이 답을 답으로 실현하는 삼원학습을 배우는 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대학은 일원학습, 이원학습, 삼원학습의 원리를 실험하여 사회에 나가기 전에 사회에서 필요한 자신만의 정신모형을 정립하는 학습의 실험실로 재편되어야 한다. 진성리더십에서는 일원 학습자에서 이원 학습자로 이원 학습자 삼원 학습이 가능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학습의 본질이라고 본다. 진성리더십에서 학습은 참 나로서의 온전함이 완성되는 Becoming의 과정이다. 학습은 삶의 물줄기를 따라 반복되고 앞의 학습의 결과가 뒤의 학습에 영향을 주며 참 나로서의 온전함을 완성한다. 참나의 온전함이 완성되어지는 한 처음에 시작했던 혼돈과 방황이 사라지고 어느 순간 세상과 자신이 조화로운 상태가 완성된다. 진성리더십에서 학습자를 학습하는 죄인이라고 설명한다. 누구든 현재의 영토에서 벗어나 이방인으로 학습하는 한 방황하고 방황하는 한 실수하고 실수에 대해서 용서하는한 제대로 Becoming을 통해 참나의 온전함을 완성해가기 때문이다. 진성리더십에서는 실수할 수 밖에 없는 주체인 자신에 대한 용서가 없다면 학습도 없다. 학교가 학습 기능을 잃은 이유도 일원학습 가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학생을 학습하는 죄인으로 재 정의해가며 더 잘 학습하기 위해 학습자의 실수를 용서해주는 용서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원래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연습장이지만 신자유주의가 침투하면서 실수하는 자를 색출해서 벌을 주는 감옥소로 전락했다. 삼원학습의 학습 잠재력을 가진 뛰어난 학생들이 일원학습의 감옥소가 되어 배움이 멈춰선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실수하지 않고 답안을 옮겨쓰는 훈련만을 받고 졸업했는데 이렇게 해서 습득한 지식이 전혀 작동이 안 되는 다른 세상이 전개되고 있다면 어떻까? 지금 취업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실제 이런 상황이 전개되면 대부분 졸업생들은 맨붕에 빠져 스스로 도태될 것이다. 이들이 맨붕이 빠져 무기력하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면 이 문제는 누구의 책임일까?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은 학습하는 죄인이고 학습하는 죄인이 공부하는 방식은 자신과 실수하는 타인에 대한 용서다. 학습하는 죄인의 방식이 세상이 바뀌어도 온전하게 자신을 만드는 유일한 방식이다. 니체의 경고대로 사람은 존재 목적을 잃고 실수하지 않는 학습에 맹목적으로 몰입하는 순간 온갖 엉뚱한 일들에 몰입해가며 비현실적인 우상을 앞세워 파시스트가 된다. 젊은이라고 다 제대로 학습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아무리 젊어도 공부가 일원학습에 머물면 일원학습으로 이미 오래전에 기득권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계몽되어 젊은 파시스트가 된다. 요즈음 대한민국에 김계리로 대표되는 청년 파시스트가 급격하게 증가한 이유이기도 하다. 변화 무상한 21세기 초뷰카 시대에 파시즘은 학습하지 못하는 죄인의 마지막 종착지다. 실수를 통해 학습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인 나는 오직 삼원학습을 통해 미래의 더 나은 나를 만들어냄을 통해서만 실수의 죄를 용서 받는다. ======== PS: 글씨는 페친이신 삼원학습가 #박영준 코치님이 선물하신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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