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속물일까? 고상한 사람일까?:
키에르케골의 보석상
키에르케골의 <삶의 단계>에는 보석상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보석상은 치열한 노력으로 보석을 정확히 감별할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삶의 자부심으로 승승장구하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던 보석상은 어느날 보석과 돌이 섞인 공기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서 터득한 보석과 일반돌을 구별하는 노하우에는 전혀 개념하지 않고 이 아이는 행복하게 놀고 있다. 보석상은 고민한다. 자신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에게도 지금이라도 보석과 일반돌을 구별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어야 하나? 아니면 이런 개념없이도 행복하게 노는 아이에게 어떻게 노하우 없이도 행복하게 놀 수 있는지를 역으로 배워야 할 것이가? 노하우를 가르쳐주면 아이도 공기의 행복을 잊고 속물이 되어갈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보석상의 고민이 시작된다.
요즈음은 인문학과 경영학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의 논의가 거세다. 어떻게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의 삶의 know how에 대해서 고민에만 빠져 있다면 우리는 아직 돈버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실용학문인 경영학에 빠져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이면에 왜 굳이 돈을 벌어야 하는지의 논의인 Know why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면 문사철을 고민하는 인문학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know why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know how에 대한 고민으로 삶의 100%의 시간을 보낸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을 세칭 속물이라고 칭할 것이다. 반면 know how에 대한 고민 없이 know why에 대한 고민에 100%로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고상한척하기는 하지만 세상물정도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당하게 될 것이다. know why를 고민하는 인문학과 know how를 경영학이 서로를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서로를 도와주어햐 하는 접점이 여기에서 생긴다. 인문학이나 경영학이 서로의 길만을 추구할 경우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know how와 know why이가 통합된 삶만이 속물과 고상한 사람의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행복에 근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이의 삶에 성인들의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know how를 터특하지 않고 행복하게 공기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계에 대해서 책임이 부과되지 않은 어린이들 밖에 없다. 어린이가 행복하게 공기놀이에 빠져 있는 것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뿐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념형적인 어린아이가 아닌 생계의 문제를 고민해야하는 정상적인 성인들의 삶 속에서 행복의 비밀은 know how와 know why에 대한 스토리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자신의 삶의 중심적인 스토리에 얼마나 잘 녹아있는지에 달려 있다. 오히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인문학인지도 모른다. 열려 있는 인문학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있는 중심스토리에 know why에 대한 줄거리와 know how에 대한 시나리오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스토리를 써내는 것이다
키에르케골의 보석상
키에르케골의 <삶의 단계>에는 보석상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 보석상은 치열한 노력으로 보석을 정확히 감별할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삶의 자부심으로 승승장구하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던 보석상은 어느날 보석과 돌이 섞인 공기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서 터득한 보석과 일반돌을 구별하는 노하우에는 전혀 개념하지 않고 이 아이는 행복하게 놀고 있다. 보석상은 고민한다. 자신의 직업이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에게도 지금이라도 보석과 일반돌을 구별하는 노하우를 가르쳐주어야 하나? 아니면 이런 개념없이도 행복하게 노는 아이에게 어떻게 노하우 없이도 행복하게 놀 수 있는지를 역으로 배워야 할 것이가? 노하우를 가르쳐주면 아이도 공기의 행복을 잊고 속물이 되어갈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보석상의 고민이 시작된다.
요즈음은 인문학과 경영학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의 논의가 거세다. 어떻게 돈을 잘 벌 수 있는지의 삶의 know how에 대해서 고민에만 빠져 있다면 우리는 아직 돈버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실용학문인 경영학에 빠져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이면에 왜 굳이 돈을 벌어야 하는지의 논의인 Know why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면 문사철을 고민하는 인문학적인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know why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이 know how에 대한 고민으로 삶의 100%의 시간을 보낸다면 사람들은 이 사람을 세칭 속물이라고 칭할 것이다. 반면 know how에 대한 고민 없이 know why에 대한 고민에 100%로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고상한척하기는 하지만 세상물정도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당하게 될 것이다. know why를 고민하는 인문학과 know how를 경영학이 서로를 배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서로를 도와주어햐 하는 접점이 여기에서 생긴다. 인문학이나 경영학이 서로의 길만을 추구할 경우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know how와 know why이가 통합된 삶만이 속물과 고상한 사람의 논쟁에서 벗어나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행복에 근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어린이의 삶에 성인들의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의 know how를 터특하지 않고 행복하게 공기놀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계에 대해서 책임이 부과되지 않은 어린이들 밖에 없다. 어린이가 행복하게 공기놀이에 빠져 있는 것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뿐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념형적인 어린아이가 아닌 생계의 문제를 고민해야하는 정상적인 성인들의 삶 속에서 행복의 비밀은 know how와 know why에 대한 스토리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자신의 삶의 중심적인 스토리에 얼마나 잘 녹아있는지에 달려 있다. 오히려 이것이 넓은 의미의 인문학인지도 모른다. 열려 있는 인문학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있는 중심스토리에 know why에 대한 줄거리와 know how에 대한 시나리오를 결합하여 자신만의 스토리를 써내는 것이다
윤정구 인문힉적 문사철의 삶을 산다는 것에서 문은 자신을 주인공으로한 삶의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는지의 문제일것이며, 사는 이 스토리가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구성하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지이며, 철은 이 스토리의 내용에 인간으로써의 행복 고뇌 성장 등의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의 문제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