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미래라는 시간개념을 알고 미래를 언급하는 것같지는 않다. 미래의 의미를 터득하고 미래의 비전을 논할 수 있는 사람들만 주창하는 비전에 신뢰가 간다.
일상을
통해 자주 언급되는 미래는 가까운 미래를 의미하지만 우리가 살아서 개입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는 죽음의 순간을 의미한다. 죽는다면 육체가 소멸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개입해서 미래를 만들지 못한다.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는 사람이 끝까지 간 미래의 의미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이다.
미래는 몸이 소멸하는 죽음을 기점으로 계산된 유예된 시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삶이 얼마나 생산적인가는 죽음과 시간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 결정된다. 죽음에 주체성을 송두리채 빼앗겨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날로 허약해지는 삶을 사는지, 아니면 죽음에 대항해서 매일 매일을 살려내 이를 통해 주체적 삶의 근육을 길러내는 삶을 사는지의 차이다.
살날은 80년이라고 설정해놓고 하루 하루를 죽음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믿고 삶을 빼기로 계산해 남은 날을 세고 있다면 죽음은 삶의 무덤이다. 하지만 이런 하루하루를 죽음과 싸워서 빼앗기지 않은 하루라고 규정하고 죽음에게 허무하게 빼앗기지 않은 날의 숫자의 더하기 개념으로 사는 사람들만 제대로 된 미래를 산다.
데리다는 이런 삶을 죽음으로부터 시간을 연기시켰다는 의미로 차연(differance)이라고 표현한다. 차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싸워 이겨낸 날들의 숫자로 삶을 역산해 계산한다. 세상에 선한 역사를 만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80년의 똑 같은 삶의 길이를 살았어도 이 중 몇 일을 죽음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살려낸 하루를 만들었는 지를 계산한 사람들의 삶의 스토리이다. 이들은 쟁취해낸 하루하루의 삶을 연결시켜 자신 삶의 기승전결 서사를 만드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둔다. 이 서사가 생을 다하는 순간 후세에게 미래의 유산으로 남겨진다. 유산은 시대를 앞서서 개입할 수 있는 마지막 미래인 죽는 순간까지 생성할 수 있는 미래를 가져와서 현재 삶에서 실현시켜 후세에게 남긴 기억될 이야기이다.
삶을 죽음에 빼앗기는 빼기의 태도로 접근한 사람들은 죽는 순간 후세에게 넘겨줄 유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고 절망한다. 진정한 영생은 죽는 순간 자신 삶의 유산으로 남긴 서사가 후세의 기억 속에서 부활해 이들 삶의 씨줄과 날줄로 엮어질 때이다. 내 삶의 스토리가 후세에 채용되어 이들의 삶을 구성하는 순간 내 육체는 소멸했어도 나는 다시 이들의 삶으로 부활하여 영생을 누린다. 죽음과의 승부에서 이겨 영생을 획득했는지의 문제는 죽는 순간 후세가 내 삶의 스토리를 채용해서 살려내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를 통해 미래가 만들었는지는 죽음의 강을 건너 미래를 만든 사람이 되는지가 핵심이다. 내 몸이 개입할 수 있는 죽음을 넘어서 사는 영생의 문제는 살아서 실현시켜놓은 유산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큰 유산일 수록 후세가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부활시켜 영속시킬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덧셈의 시간개념을 가진 사람에게 현재는 유산의 공작소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나 까르페 디엠(Carpe diem)은 죽음과 삶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임을 연상시키는 맨츄라이다. 모멘토 모리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이고 까르피디엠은 "현재를 즐겨라" 현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죽음과의 투쟁에서 삶을 쟁취해낸 사람들을 의미한다.
결국 죽음과 삶을 결정짖는 것은 시간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과거는 우리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냥 기억으로 전환되고 잊혀져 죽음의 블랙홀로 빠져든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도 우리가 개입하지 않고 그냥 찾아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예측하고 기다리다 십중팔구 놓친다. 개입없이 기다리는 미래는 한 눈을 파는 사이 우리를 피해 쏜살같이 과거로 달아나 역시 죽음의 블랙홀로 사라진다. 결국 현재를 제대로 사는 것은 과거를 기억해서 현재와 접속해 새 길을 만들어 살려내는 일이다. 과거를 현재로 부활시키는 개입이 없다면 과거는 잊혀진 기억의 공동묘지다. 미래에 대한 개입은 미래를 현재로 가져와 현재화 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다. 상상의 미래를 따라기가보다는 내가 가장 먼 미래인 죽음 앞에까지 직접 먼저가서 찾아내 지금 오늘의 내 삶의 터전으로 가져와 씨앗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실제하는 시간은 현재만 존재하고 결국 나머지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미래라는 상상이든, 잊혀질 과거이든 죽음이다. 시간에서 실재하는 것은 현재와 죽음 뿐이다.
나바호 인디언들도 이런 죽음의 원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부족 중 하나이다. 이들은 선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언명을 전수받아 삶에서 실천한다.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이런 죽음에 대한 원리를 기업경영에 가장 잘 반영한 회사를 공의기업이라고 칭한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다른 태도를 가진 경영자에 의해서 경영된다. 이들은 기업이 죽음의 검증을 통과한 햇수를 100년이라고 가정할 때 100년이 되었을 때 회사가 실현한 목적에 대한 약속의 정산을 경영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시간에 대한 태도는 죽는 순간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점이 끈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는 Looking Backward의 방식이다. 공의기업과는 반대로 하루 하루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업들이 미래를 보는 방식은 미래는 과거, 현재, 가까운 미래로 따라 흐른다고 생각하는 현재로 부터 미래를 보는 Looking Forward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있다.
변화가 특이점을 향해가서 모든 것이 불확실해지고 불투명해지는 초뷰카시대의 솔루션인 공의기업은 100년 기업의 유산을 약속으로 정하고 이 약속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재의 사업을 도모하는 기업이다. 이들은 죽음을 생의 공작소로 받아들인다. 본인의 최근 저서 <초뷰카시대 지속가능성의 실험실>에서는 스탠포드 연설에서 Looking backward의 시간개념을 처음이야기했던 스티브 잡스가 설립한 애플과 Looking backward 방식의 혁신을 통해 미래를 만들고 있는 아마존을 초뷰카시대 지평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 공의기업으로 거론된다.
초뷰카시대 뺄셈의 시간경영개념인 Looking Forward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생계기업들은 반드시 길을 잃는다. 사람도, 리더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길을 잃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