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9-17 10:21
[N.Learning] 환대를 연기하다 노룩악수
 글쓴이 : Adminis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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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를 연기하다
노룩악수
최근 정계에서 벌어지는 노룩악수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노룩악수를 처음 들었을 때 한자어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No Look 악수란 조어였다. 노룩악수를 보다 쉽게 정의하면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악수이다. 악수라는 최소한의 환대행위에서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환대에 대한 결례가 공존하는 상태이다. 노룩악수는 환대의 이중충돌이 발현된 것이다. 환대에 대한 연기다.
우리는 상대를 환대하지도 않고 한편으로는 환대를 연기하는 것일까?
이런 이중적 환대 행위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철학자는 타자의 철학자로 알려진 레비니스이다. 레비나스는 우리는 자연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불가능함을 근거로 타자철학을 정립했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나라는 사람의 경계(동일성)에 의해서 개념적으로 포획되거나 훼손되지 않은 타자 그대로의 절대적 타자를 의미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심지어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역지사지도 타자가 가진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자세는 아니다. 역지사지란 상대방의 신발(고통)을 대신 신어 본 내 고통(동일성)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내가 이해한 상대의 고통에 대응하는 것이다. 결국 내 고통과 상대의 고통을 같이 취급하는 동일성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이 없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자를 자신과는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타자 철학이 없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타자와 타자의 고통은 어떻게 체현할 것인가?
레비나스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주체성으로 상대를 포획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상대를 그냥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타자되기가 시작된다고 본다. 이런 타자되기는 내 입장에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주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서로의 얼굴은 개념적으로 상대를 이해하기 전 상대의 고통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선이해를 내려놓고 상대를 대면하는 순간 상대와 나와의 거리는 사라진다. 마치 자신에게 자신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것과 동일한 현상이 발생한다.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상대에 대한 개념은 이 얼굴에 자꾸 분탕질을 해대지만 이것을 넘어서 상대의 얼굴을 얼굴로 주시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고 거절할 수 없어서 하는 악수는 거절한 당사자가 이고의 산성 속에 갇힌 허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노출하는 행위다. 정치가에게는 자신의 그릇 크기를 노출하는 치명적 사건이다. 상대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는 겁장이거나 아니면 그냥 상대가 싫다는 것을 어린이처럼 고백한 것이다. 본인은 상대를 품고 환대할 그릇이 못됩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을 때 서로 얼굴을 보여주는 행위는 상대에 대한 최고의 환대다. 가끔 회사에서 종업원을 문자나 이메일로 해고한다. 고통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이겠지만 고통의 당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통에 침까지 뱉는 극단적으로 무시를 당한 것이다.
모든 소통에서 최고의 소통은 얼굴을 대면해가면서 하는 대면적 소통이다. 서로 믿는다는 전제가 있다면 얼굴만이 서로의 선입관에 의해 재단되지 않은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화로 이끌어낸다. 얼굴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은 모든 대화는 언어와 개념이 매개로 사용되어야 하고 이 언어와 개념 속에는 항상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동일성이 개입된다. 결국 언어와 개념에 의한 소통은 진정한 상대에 대한 이해에 눈을 감는 행위이다.
이런 이야기는 상대와 나 사이에 힘이 비슷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제안이다. 상대와 나 사이에 힘과 처지의 격차가 존재한다면 힘 있고 처지가 나은 사람이 나서서 상대에게 얼굴 만남을 제안해야 제대로 된 환대의 터전이 마련될 것이다. 힘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은 자선이지 환대는 아니다. 자선과 환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자선을 통해서는 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동일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선거철만 되면 대통령 후보들은 전통시장을 찾아가 서민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거나 같이 국밥을 먹는 코스프레를 하지만 유권자들은 이런 얼굴을 보는 행위가 고도의 계산된 환대의 코스프레라는 것을 다 안다. 이처럼 환대를 연기해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들의 말로는 모두 비참했다. 세월호로 고통받던 사람들을 제대로 환대하지 못했던 정권은 정권을 잃었다.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환대해야 할 대상이 생기면 뜬금없이도 전화해서 "언제 얼굴이나 보자"고 제안한다. 상대의 얼굴을 그대로 보는 것이 환대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혹시 주변에 소원해진 사람이 있으면 전화해 "얼굴을 마주하는" 환대의 식탁에 초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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