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줄이 되거나 날줄이 되어주다!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 선물 "지식은 힘이다"라는 명제로 계몽주의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베이컨은 창조는 직조와 초월의 행위라고 규정한다. 창조는 인간이 근원적 변화를 통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다. 베이컨은 창조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개미, 거미, 꿀벌의 삶을 예로 든다. 개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단순복제해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진 사람을 비유한다. 거미는 자신의 정신모형의 독선에 갇혀서 확증편향으로 받아들인 사실만을 진실이라고 믿는 차별, 편견, 혐오의 주체다. 꿀벌은 꿀을 생산하기 위해 개미처럼 밖으로부터 많은 것을 단순복제해 가져오지만 자신의 고유함을 가미해 자신만의 향취가 밴 꿀을 만들어낸다. 꿀벌은 개미와 거미를 날줄과 씨줄로 직조하고 이들을 초월해 자신의 몸으로 고유한 빛을 만들어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다. 이들이 창의성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조와 초월의 원리를 따랐기 때문이다. 베이컨은 개미의 삶이 세상의 지평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예로 신문기자, 전문가, 과학자, 데이터 사이언티스를 예로 들고, 거미의 독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예로 정치가, 종교인, 철학자를 든다. 베이컨은 거미와 개미의 삶에 함몰되지 않고 이들을 직조하고 초월하는 삶을 사는 꿀벌과 같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낙관적 실용주의자라고 칭한다. 이들이 세상을 진실되게 바꿀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자, 종교인, 신문기자, 정치가, 과학자, 전문가를 넘어서 꿀벌과 같은 삶을 사는 낙관적 실용주의자들이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기둥이라고 주장한다. 베이컨의 주창한 창의적 삶이 함축하고 있는 직조와 초월의 주장은 21세기 초뷰카시대에도 신계몽주의의 통찰을 제공한다. 산업화 시대 혹은 정보화 시대에 적용되던 직조와 초월의 계몽주의 원리는 초뷰카시대에 디지털화에 적용되어 신계몽주의 원리로 부활한다. 창조란 시대를 초월해 날줄과 씨줄을 직조해 세상의 지평을 초월하는 근원적 변화 행위다. 지금과 같은 AGI 디지털 혁명 시대에도 날줄만 추구하는 사람들은 베이컨의 개미의 삶을 통해 세상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 수 있다는 허구에 빠진 사람들이다. 매일 AI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을 업데이트 하지만 업데이트 하면 할수록 자신은 대체가능성이 쉬운 대상으로 전락한다. 또한 지금 현실이 전개되는 것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유한 씨줄만으로 새로운 지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더 큰 문제다. 이들은 자신의 편협한 정신모형에 맞는 데이터만 편식해가며 자신의 삶을 과도하게 편협한 데이터에 최적화 시키고 확증편향을 통해 자신을 자신이 만든 정신모형의 감옥에 가둔 삶을 산다. 자신이 감옥에 갇혀 살고 있음에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옥이 더 안전하다고 감옥으로 끌어들인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된 정신모형을 무기로 세상에 편견과 차별을 퍼트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편재한 데이터의 모집단을 모르고 자신 주위에서 편식한 데이터에 근거해 모형을 정교하게 만든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거미의 독선에 빠진 사람들이다. AGI가 이끄는 디지털 시대에도 꿀벌은 개미와 거미를 직조해 자신만의 고유한 지평의 빛을 만들어내는 초월의 사람들이다. 디지털 시대에도 직조복제와 초월이 없다면 그냥 개미의 대체가능성을 높여주는 단순복제이거나 거미의 차별과 독선일 뿐이다. 창의성이란 남들이 만들어 놓은 날줄을 개미처럼 단순복제(Mimetic Isomorphism)하는 것이 아니라 이 복제를 통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초월하는 지평을 여는 직조복제(Weaving Isomorphism) 행위다. 창의는 자신의 존재목적을 의도의 씨줄로 삼아 현재의 지평을 초월하는 행위다. 창조는 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배우는 단순복제에서 시작하지만 창조의 종착역은 단순복제를 초월해 자신의 몸을 통해서 만들어진 일인칭 주체적 변화의 결과다.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자신의 일인칭 진실 체험이 없는 사람이 직조복제를 통해 세상을 밝히는 창의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에 발매된 <급진거북이: 진성리더의 변화전략 (잉걸북스, 신승철)>에서는 급진거북이의 직조복제의 역량을 동적역량(Dynamic Capability 책 12장)이라고 설명한다. 세상을 더 창의적으로 변화시키는 장본인은 자신의 정신모형과 타인의 정신모형 사이에 직조복제 원리를 따르는 급진거북이들이다. 급진거북이는 자신의 정신모형을 먼저 꺼내기 전에 상대가 어떤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는지를 공감적으로 경청한다.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정신모형이 날줄이 될 수 있는지 씨줄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둘을 직조해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태피스트리를 공동의 정신모형으로 만들어낸다. 씨줄인지 날줄인지의 문제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공진화 시키는 과정에서 어떤 정신모형이 더 존재목적에 근접해 있는지의 문제다. 상대의 정신모형이 더 존재목적을 공진화시키는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씨줄을 주장하기보다는 기꺼이 날줄이 되어준다. 새로운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신모형에 근거한 가치판단을 중지하고 상대의 정신모형을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보는 under_standing이 요구된다. 최근 개신교가 사람들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전도과정에서 자신의 정신모형의 우위성에 대한 편견으로 상대의 정신모형을 제압하는 십자군 전쟁 때문이다. 기독교가 일반인에게 기피해야 할 종교로 전락한 이유는 스스로가 시대적 맥락에 울림이 없는 거미의 독선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혼란도 자신의 정신모형이 우월하다는 것을 전제로 상대의 정신모형을 힘으로라도 제압해야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제대로된 믿음은 더 높은 곳에 세울 수 있는 화평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지만 자신의 믿음에 대한 근거없는 우월성은 편견, 갈등, 차별, 혐오를 만든다. 급진거북이의 동적역량은 직조복제를 통해 세상을 조금씩 확실하게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전략이다. 이런 창의성이 있는 급진거북이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밤에도 북극성을 가슴에 품고 자신을 통해 세상의 지평을 밝히는 태양이 떠오르는 꿈을 꾼다. 다른 한편으로는 씨줄과 날줄의 직조복제 과정에서 상대의 정신모형 속에 숨겨진 가시를 물리력으로 수술해 뽑아내기보다는 따뜻한 긍휼의 사랑으로 녹여내는 일을 동시에 수행한다. 세상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목적이라는 북극성을 볼 수 있는 안경을 쓴 사람이기도 하지만 상대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아픔의 눈물로 자신의 마음의 눈과 상대의 마음의 눈을 씻어낸 사람들이다. 근원적 변화는 자신의 정신모형의 감옥에 다른 사람을 제압해서 투옥시키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정신모형을 남들에게 가르치는 행동도 아니다. 창의적, 근원적, 생산적 변화는 정신모형의 직조를 도와주는 셰르파 행동이다. 급진거북이는 고유한 새로운 태피스트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세상의 운동장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더 넓은 세상의 지평을 보여주는 셰르파다. 동적역량이라는 직조와 초월을 통해 사부작 사부작 변화를 완성하는 급진거북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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