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20 12:57
[N.Learning] 생계형 정치 vs 소명의 정치 I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2,507  
"어느 날 유명한 외국 테너가수가 세종 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우연히 그 공연의 티켓을 구하게 됐다. 10만 원이나 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나오는데 너무 행복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클래식을 좋아하는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비밀활동을 할 때라 늘 안전을 위해 서로의 동선을 체크했는데 너무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알리지 않고 몰래 공연을 보고 왔다(웃음). 늘 돈이 별로 없어서 라면을 먹거나 굶어야 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그 티켓을 팔아야 했는데 말이다(웃음). 그러면서 공연을 다 보고 나오는데 '여전히 내가 문화적 격차를 극복해내지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에 갑자기 미안함과 자책감이 들었다"가 덧붙여지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의 이야기다.

"사회를 바꾸는 운동에 뛰어들겠다고 최종적으로 결심한 것이 대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그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내장이 다 뒤집힐 정도로 게워냈던, 너무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영혼을 바꾸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내 영혼에 검은 상장을 단다'는 느낌으로 운동을 했다." 무엇이 그로 영혼에 상장을 달기까지 고민하게 했을까?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보지만,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인상적인 기억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선생님이 '동일방직사건'을 이야기해주셨던 것과 그분이 추천해 주셨던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이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때부터 사회적 약자에 관심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원이 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과정 동안 내내 가지고 온 화두인 것 같다."

그를 보며 영화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혁명을 꿈꾸며 바리케이드를 쳤던 청년들이 생각났다. 그래서 20대 바리케이드를 쳤던 은수미가 지금은 법과 제도를 만들고 있는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데 20대의 은수미가 지금의 은수미에게, 50대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20대의 은수미는 50대의 은수미에게 이야기를 못한다(웃음). 그 이유는 조금 과격한 생각이긴 했지만, 나는 내가 서른이 안 돼서 죽을 줄 알았다(웃음). 20대 초에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기도 해서 그런지 내가 서른 살 이상까지 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감옥에서 서른이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는가(웃음)."

더불어 "50대의 은수미가 20대의 은수미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 참 잘 버텼다. 고문도 잘 버텼고, 구속 생활도 잘 버텼어. 생각한 것처럼 우리 사회가 많이 개선되지는 못했지만 너의 책임이 아니야"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지금도 실수를 많이 하는데 그때는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겠나(웃음). 그러면 그렇게 가슴이 많이 아팠고, 자책을 많이 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와 나의 눈이 함께 빨개졌다.

대선 이후 '소명으로서의 정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는 그에게 정치인 은수미가 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찾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솔직히 지금까지는 '정치가 뭐고, 사회운동이나 연구활동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잘 몰랐다. 하지만 민주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보면서 내가 왜 정치인이어야 하고 어떤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가 사회운동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도 깨닫고 있다. 앞으로 내가 정치 활동을 하는 동안은 민주당이 혁신적인 정치조직과 비전을 가진 정당이 되게 해서 다시 국민들의 마음을 얻고, 그래서 다음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한 계획들을 세우고 추진하려고 한다. 그것이 정치인 은수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고, 그것의 기초는 노동이 될 것이다"라고 답한다.

20대에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운동을 시작한 이후론 단 한 번도 뒤돌아보거나 도망가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 평가를 했다"던 그가 이제 '소명의 정치'란 새로운 과제 앞에 다시금 자신을 게워내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다. 그의 게워냄에, 그의 치열함에 응원을 보내고 싶다.


▲ 민주통합당 은수미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한국에서 노동 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불편한 삶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듯하다. 무엇이 은수미 의원을 노동으로 이끌었는가? 어떤 개인적인 계기라도 있었는지 궁금하다.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보지만, 그 이유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인상적인 기억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사회선생님이 '동일방직사건'을 이야기해주셨던 것과 그분이 추천해 주셨던 조세희 작가의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이었다. 그 두 가지가 한참 정체성이 형성되던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것 같다.

또 하나가 그 당시에 내가 살던 신림동의 판자촌에 대한 기억인데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몇백 미터만 걸어가면 판자촌이었고 친구들이 거의 그곳에 살았다. 한번은 친구 집에 놀러가서 술래잡기를 하다 몸을 밀쳐 벽에 부딪쳤는데 벽에 구멍이 났다. 벽이 스티로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내 친구들의 삶과 나의 삶이 너무 다르다는 게 납득이 안 갔다. 이야기로 듣거나 책을 통해 보았던 현실 세계와 실제 내 친구들의 삶을 통한 본 현실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만연한 인식 속에서 그 때는 '수녀가 되어서 이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 집이 성공회 집안이라 중·고등학교 때까지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그 이후 공부만 하다 대학에 들어와서야 '이게 정말 현실이구나'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때부터 사회적 약자에 관심과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이 의원이 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과정 동안 내내 가지고 온 화두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정착이 돼버렸다.

아마도 어렸을 때의 형성된 기억이 굉장히 오래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박근혜 대통령이 무섭다고 하는 것인데, 아마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배운 것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거다. 나도 어린 시절, 오디오 세트가 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클래식을 취향으로 살면서 살던 사람이라 이런 삶의 스타일을 바꾸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살아왔는데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어느새 노동문제에 천착하는 것이 나에겐 참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활동한 배경이 달라서 주변의 반대가 많았을 것 같다. 그런 상황을 뚫기까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반대들을 어떻게 뚫어냈나?

굉장히 힘들었다. 가끔 '당신이 20대로 되돌아간다면?'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절대로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내게 20대는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이다.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에 처음 서울대 사회학과를 들어갔을 때 그 당시 서울대에서 여성 비율은 굉장히 낮았고, 특히 사회대에서 여성 비율은 10%도 안 됐다. 중·고등학교 때 여학교만 다닌 탓에 대학교를 들어와 보니, 거친 남성들이 늑대처럼 느껴졌다(웃음). 남녀 간의 격차도 컸고, 문화도 달라서 상당히 힘들었다. 또 그때는 '백골단'이라고 불리는 전경들이 학교 잔디밭에 쫙 깔려있었는데, 가끔 전경들에 의한 성폭력 사건도 일어났다. 그런데 심지어 남자 교수들이 '한강에 배 지나가면 자국이 남냐?'라고 이야기하는 게 학교의 현실이었고 이런 무지막지한 현실을 용인하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자유도 정의도 없는 그리고 평화도 민주도 없는 심각한 상황에서 청년기를 보낸 것이다. 지금처럼 생계나 일자리에 대한 고민과는 달랐지만 나름대로 고민이 심했다.

그다음에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마르크시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군사관학교 출신 군인이었던 아버지 슬하에서 살아왔던 나의 환경과 여러 사회문제들을 착취와 계급전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에게 마르크시즘은 그 문제들을 해석하는 여러 관점 중에 그중에 하나일 뿐이지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다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 사회대에 들어와서 물을 흐리느냐"는 말도 여러 번 들었다.

옷차림도 문제가 되었다. 처음 대학에 들어왔을 때 스커트를 입었었는데 몇몇 주변의 상황과 분위기 때문에 어느 날부터는 입지 않게 되었다. 아예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원래 예쁜 것을 참 좋아했는데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구두도 신지 않고 청바지나 짙은 색 바지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는 방식으로 바꿨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내 자신과 매번 싸웠다. 한창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줄임말, 은수미 의원은 1989년 백태웅·조국 교수와 박노해 시인과 함께 사회운동 조직인 사노맹을 결성했다) 활동을 할 때였는데 어느 날 유명한 외국 테너가수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는데 우연히 그 공연의 티켓을 구하게 됐다. 비밀활동을 할 때라 늘 안전을 위해 서로의 동선을 체크했는데 너무 가고 싶어서 처음으로 알리지 않고 몰래 공연을 보고 왔다(웃음). 10만 원이나 되는 공연을 보기 위해 거기까지 걸어가서 그것을 보고 나오는데 너무 행복했다. 늘 돈이 별로 없어서 라면을 먹거나 굶어야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그 티켓을 팔아야 했는데 말이다(웃음). 그러면서 공연을 다 보고 나오는데 '여전히 내가 문화적 격차를 극복해내지 못하구나.'하는 생각에 갑자기 미안함과 자책감이 들었다.

그렇듯 20대 내내 운동하는 나와 원래 내가 서로 충돌하며 '나는 왜 이 정도밖엔 안 될까.'라는 고민을 달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운동을 하면서 정의와 민주를 위해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20대 청춘을 보내며 사랑도 마음대로 못해보고 발레나 오페라 같은 내가 좋아하던 것도 감추고 심지어 내가 좋아하던 옷 색깔도 숨겨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 참 힘들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내가 배웠던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이다. 의원이 된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에서부터 왜 내가 의원생활을 하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다 보니 내 탓을 과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중에는 더러 남 탓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고 어쩌면 그게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자신만 탓하다 보니 힘이 빠질 때도 더러 있다. 그래도 어떠한 현실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여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하며 선택하는 것이 힘이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일들을 스스로 버텨낼 방법이 없다.

92년 '사노맹' 활동으로 6년간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의 시간에 대해 "언제나 저를 살려준 하늘의 뜻이 무엇일까를 묻게 하는, 그런 겸손함을 좀 배운 것 같다"고 한 기사를 보았다. 창문이 없는 독방에서 6년을 지낸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많이 아팠다. 여성으로 감옥에서 6년 정도를 산 사람도 드물지만, 나만큼 아픈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두 번이나 수술했고, 폐렴에서부터 폐결핵까지 환경이 안 좋으면 걸리는 질환으로 시달렸다. 동시에 심리적인 문제가 생겨 항상 내가 정상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안기부의 남산분실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을 때의 기억은 꽤 오랫동안 심리적인 타격을 준 것 같다. 나를 고문하는 고문기술자들도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는데, 나를 고문하고 잠시 쉬는데 자기들끼리 자식 이야기도 하고 전셋값 이야기도 하고 "오늘 식사로 뭐 먹을까?"하는 이야기도 하더라. 그러고 나서 한 30분 뒤에 다시 고문을 한다. 그때 내가 들었던 생각은 '내가 사람인가'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고문을 할 대상일 뿐 인 거다. '내가 동물인가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경험을 벗어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 그 과정에서 내 입으로 동료들과의 활동을 진술해야 한다는 것이 참 힘들었다. 물론 나는 영화 <남영동 1985>의 고(故) 김근태 선생님처럼 심하게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고통스럽기도 하고, 고문관들이 이미 친구들이 다 진술을 했다기에 "그러면 진술을 한 것에 대해서만 맞는지 아닌지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겠다"고 하고 진술을 했다. 고문관들이 친구들이 진술하는 목소리를 녹음하여 들려주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녹음 내용대로 그 이야기가 맞는지 틀린지 진술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를 비롯해 모든 동료들이 이렇게 무너지는구나, 인간이 참 나약하구나'라는 생각에 절망했다.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출소 2년 전 즈음에야 그런 나를 스스로 용서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사람을 참 예뻐하게 된 것 같다. '사람이란 참 약한 존재이고 각자 굉장히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다. 고문과 같은 강압에 의해 무너지면 누구나 심지어 나조차도 내 뜻과 의지와 정반대되는 대답도 할 수 있다. 그런 나약한 인간이 이나마 버틴 것은 참 잘 살아온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그래도 민주와 정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본다는 것이 참 가상하고 대단한 모습인 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토닥이니 갑자기 자유로워졌고, 내가 한결 예뻐진 것 같았다(웃음). 그러면서 나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무척 관대해졌다.

ⓒ프레시안(최형락)
내 스스로 무너져본 경험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첫째로 사람들에게 무너질 정도의 힘겨운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사람이 무너지면 반드시 바뀐다는 거다. 사람들의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세 번째로 무너졌음에도, 다시 새롭게 살아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이 성공하든 아니든 엄청 많은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구나, 무너져 이렇게 변했구나, 그렇지만 이 사람은 이렇게 많이 노력하는구나'라고 감싸 안는 것이 필요하다. 그 당시 내가 참 싫어했던 노래 가사가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거야'인데, 오히려 아픈 만큼 무너지는 게 맞고 아파서 성숙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지금의 20대·30대에게 가장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사회가 이들을 아프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그들을 너무 아프게 하고 무너지도록 만들고 성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반성해야지 그들을 비난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아마 이것이 감옥에서 나와서 내 삶의 기조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고통스럽다. 의원이 되어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간혹 잠을 자기 어렵다.

6년이란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고 일상에 정착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감옥에서 나오고 처음 2년 동안은 적응이 안 되고 많이 힘들었는데 그 후에 결혼도 하고 나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런 소박한 삶을 꿈꿨다(웃음). 내 취향대로 옷을 입고, 음악을 듣는 것,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자유로웠고 어떤 것을 해도 내가 크게 거스르거나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더 이상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2·30대처럼 무엇인가 소명을 가지고 벽에 부딪혀보고 넘기도 하고 혹은 그 벽을 뚫어보려고 하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는 우리 사회가 옛날에 화염병을 들고 가시 철망을 제거하고 억지로 올라가고 벽을 뚫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노동 연구를 해왔다. 그런데 40대 후반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을 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것이 교만한 것이었나, 내 세대가 여전히 책임지고 바꿀 소명이 있는 것인가, 이런 고민이 많았다. 정치인이 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결론을 내린 것 같다. 필요하다면 벽을 뚫어야 한다고. 소박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고. '또 해야 하나? 좀 지겹다, 힘들다'는 생각도 했지만 이것을 20대나 30대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되고, 결국 20대 때 내가 나의 세대의 문제에 직면했던 것처럼 50대인 내가 내 세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부하지 않았고 이 길을 선택했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그런 시대정신, 역사의식의 발로이자 사회적 주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손어진, 김민희)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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