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자신의 과거의 행적과 지금 일하는 방식에 대한 알고리즘이 모두 추적되고 파악되는 시대는 짝퉁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가 힘들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변호사 판사 검사 회계사 의사 등의 전문직 일도 기계학습에 의해 알고리즘이 가장 쉽게 파악될 수 있는 사양직종이다. 젊은이들의 예측과는 달리 이들은 생존을 위해 기계와 싸워야하는 극한 직업군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시대적 추세를 반영하면 종교와 목회자, 종교인의 개념도 변화가 요구된다. 지금 시대에 종교가 담당하는 역할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어떤 종교든 종교의 가장 큰 패착은 과학을 초월하는 철학의 기반을 제시하기보다는 과학과 싸워서 이겨야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분은 농담이지만 기독교가 쇠퇴하는 이유는 구글에 물어보면 다 답을 주지만 하나님께 물어보면 답을 주지 않는다고 풍자하기도 한다. 종교의 역할과 사명을 심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퍼트리는 위험한 풍자이다. 종교는 과학이 경쟁상대가 아님에도 과학과의 십자군 전쟁으로 이미 전략의 상당부분을 손실했다. 과학과의 무모한 싸움을 멈추고 과학을 초월하는 세상에 대한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종교는 세상을 위한 공진화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세상은 모두 보이는 것만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서 미래를 주체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만이 미래에서의 시민권을 행사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실증의 세계를 다루고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세계를 다룬다. 원래부터 종교와 과학은 추구하는 영역이 다르다.
종교는 원래 기계의 알고리즘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아픔과 영성의 문제를 다뤄왔다. 대부분의 종교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태도인 긍휼감(compassion)을 기반으로 한다. 기독교에서 Compassion은 긍휼로 번역하지만 불교에서는 compassion을 자비로 번역하고 종교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유교에서 측은지심도 compassion이다. Compassion은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재화하고 이들과 손잡고 행동으로 풀어내는 성향이다.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위로만 하고 이를 위한 행동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종교가 되기는 힘들다. 종교라기보다는 미신과 사이비일 뿐이다.
이들은 긍휼을 통해 찾아낸 세상의 고통을 해결해서 내세에서든 이승에서든 인간으로서의 존재우위를 실현하는 삶을 살게 도와준다. 제대로된 종교라면 긍휼로 파악된 아픔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과학과 기술이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넘어서서 정신의 근육이나 영성의 근육을 훈련시킴을 통해 해결하도록 돕는다. 종교는 경쟁우위가 아닌 인간의 아픔을 영성과 정신근육을 통해 해결함으로 각자가 내세와 이승에서든 자신의 존재우위를 체험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핵심 기능이다.
긍휼의 문제를 자신만의 영성의 근육을 통해 해결해 존재우위를 구현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제도권 종교에 속에 있지 않아도 누구나 신실한 종교인인 셈이다.
디지털 혁명의 성숙기에 진입하면 모든 사람은 알고리즘이 완전히 파악되어 아바타로 복제가 가능한 사람과 알고리즘이 파악되지 못해 복제가 불가능한 계급으로 나눠질 것이다. 당연히 알고리즘이 파악되지 못한 사람들만이 미래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며 자신만의 존재우위를 누리는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신실한 종교인이 되지 않고 아바타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통 제도권에 속해 있어도 긍휼감도 없고 영적근육도 없어서 아바타의 복제가 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면 결국 무늬만 종교인인 셈이다. 기계는 이 사람들을 우선적 공략대상으로 삼아 자기편을 규합할 것이다.
제도권 종교가 경쟁해야 할 대상은 과학이 아니라 제도권 종교에 편입되지 않았음에도 종교적 신실함으로 자신의 존재우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제도화된 종교적 배경의 지지 없이도 이런 삶을 구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제도화된 종교의 죽음을 예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