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라면 지금 어떤 리더십을 발휘했을까?
한글 창제에 담긴 세종 리더십
정인지의 훈민정음 사용 설명서에 보면 세종이 한글을 왜 만들게 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여기서 "통"은 결석이 생겨서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음을, "어리석은"은 고통을 이기지 못한 "불쌍한"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이를 "딱하게" 여긴다는 것은 "측은지심" 혹은 "긍휼"에 대한 체험을 뜻한다.
김경묵이 출간한 <이도 다이어리(pp: 375-376)>에 보면 세종이 한글 창제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에서 세종은 당신은 정(情) 때문에 한글을 창제했다고 밝힌다.
<글자 정(情)은 마음을(心) 고요하게(靑) 한다는 뜻의 글자다 글자의 뜻처럼, 소민이 자신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한계(艮)에 다다랐을 때, 막다른 구석에서 느낀 처참한 심정(心)을 훈민정음으로 적어서 수령에게 보여주고, 한(恨)을 풀어 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글자를 몰라서 당하고 살아야 했던, 소민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고 평안하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정인지는 사용 설명서에, 새 글자를 익히면 누구나 한을 글로 써서 전달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을 담아서 정이라 썼고, 나는 우리나라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해서 한이 쌓였다는 뜻을 담아서 정이라 썼다.>
세종은 자신의 마음을 정(情)이라고 소박하게 표현했지만 본인이 해석하는 세종의 마음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이해인 정을 넘어 고통을 반드시 이겨내고 말겠다는 긍휼(矜恤)의 마음이었다. 세종은 단순히 백성들이 아픔을 이해하고 그냥 말로 위로해주는 왕이 아니라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왕이었다. 세종이 풀어주고 싶었던 것은 백성들의 고통이 쌓이고 쌓여 응어리진 한이다.
세종이 백성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정의 차원에서 머물렀다면 백성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서당을 더 많이 열고 백성들에게 한자를 더 배울 기회를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상대의 아픔을 인지하고 위로하는 정을 넘어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휼을 실천했다. 세종은 한자는 어려워서 식자들도 배우기 힘든데 모든 백성들에게 한자를 배우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고통에 진통제를 주는 처방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휼은 고통에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뿌리를 찾아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의 원인의 수준에서 문제를 풀다 보니 한자를 더 배울 수 있는 학당을 열기보다는 이해하기 쉽고 누구나 몇 일 만에 배울 수 있는 28자 한글을 창제하게 된 것이다.
세종처럼 긍휼의 정치를 하는 군주는 다음과 같은 리더십의 본질을 이해한다.
첫째, 백성들 중 누가 가장 아픈 백성인지를 찾아내고 이들에게 더 정을 준다. 둘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아픔을 위로하는 수준을 넘어 원인의 수준에서 혁신적 처방을 만들어 낸다. 혁신이 없는 긍휼은 긍휼이 아니다. 세상을 변화시킨 제품을 만들어낸 세기의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은 휼의 마음을 기반으로 원인의 수준에서 혁신과 창의성을 발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처방을 이용해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희열을 선사하고 이 희열을 이들과 같이 향유한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은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 리더십의 본질을 가르쳐주고 있다.
아마도 긍휼의 세종이라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 중 지금 누가 가장 아픈 사람들인가?
이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여 같이 아파할 수 있나?
아픔을 원인의 수준에서 해결할 근원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고통을 실질적으로 해결해 국민들과 같이 생생지락을 노래할 수 있는가?
대한민국에서 소위 정치를 꿈꾸거나 리더십을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제안한다. 방대한 세종 실록을 다 읽지 못한다면 최소한 세종의 정치적 리더십 일기인 <이도 다이어리>를 필독서로 읽었으면 한다.
한글날을 기념하며
2024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