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하루 종일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 희망은 동네 사랑방이다. 기대를 가지고 사랑방 문을 열었다. 방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는 "아무도 없네"라고 자조적으로 내뱉고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인사도 없이 무례하게 문을 닫고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방안에는 분명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었는데 아이는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만난 듯 "아무도 없네"라고 말했다. 아이는 정말 이들을 보지 못한 것인가?

이런 착시 현상은 어른들에게 일상적으로 더 자주 일어난다. 심지어 대통령은 예천 수해 현장에서 현란하게 연기하는 사단장만 보고 쓰러진 채상병과 채상병 가족을 보지 못했다. 대통령의 시력에 문제라도 생긴 것일까? 국민들 눈에는 장군보다 채상병과 가족들이 더 또렸하게 보였는데 왜 이분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까? 이분은 자신의 가족과 측근을 빼고 모든 국민을 외국인이라고 여기는 듯 듣기 시험도 치르게 하고 잊을만하면 나타나 다양한 국가 시험으로 국민을 괴롭힌다. 이번 시험 과목은 청각 시험이 아닌 시각 시험이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눈은 시력이 2.0임에도 누구는 보이고 누구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청각이 2.0이어도 누구에게는 들리고 누구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나바호 인디언을 모티브로 만든 아바타 영화에서 아바타들이 동족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안녕하세요"가 아닌 "당신이 보입니다 (I See You)다. 투명 인간처럼 아무리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던 당신이 오늘은 본연의 모습으로 또렷하게 보인다는 고백만큼 상대를 고유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다른 말이 없다.

실마리는 유홍준 선생이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인용한 유한준 (兪漢雋, 1732 - 1811) 발문을 의역한 문구에도 나온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문화재와 같은 죽은 사물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다르게 보여 살아 있는 것으로 깨어나는데 살아 있는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할 경우는 더 극단적이 된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연인들에게는 서로가 영화의 공동 주연이 된다. 주변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만 맹목적으로 본다.

문제는 사랑의 편애다. 편애의 대상이 되면 상대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부모의 눈에는 고슴도치 같은 자신의 자식만 보인다. 아이의 눈에는 아이만 들어온다. 아이의 아이에 대한 편애 때문이다. 대통령의 눈에 장군만 들어왔지 숨진 병사와 병사의 가족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다. 사랑에 대한 편애가 작동한 것이다.

사랑의 편애는 자신과 상대가 유전자 복권으로 받은 재능, 미모, 잘난 모습만을 사랑할 때 발현된다. 사랑의 편애는 자신과 상대가 가진 고통조차도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치유된다. 상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껴안아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긍휼의 사랑이 사랑의 편애를 극복한 사랑이다. 긍휼의 사랑을 가진 사람들만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들이 온전하게 눈에 들어온다.

유한준(兪漢雋, 1732 - 1811)이 당대의 수장가였던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남긴 발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知則爲 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유한준의 발문을 사물이 아닌 인간에게 적용되는 현대적 문구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다.

"상대와 자신이 내면의 고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긍휼로 사랑하게 되고, 긍휼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와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고, 제대로 보면 상대의 전체가 드러난다."

그렇다. 인간이 인간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자신과 상대의 고통을 볼 수 있을 때다. 긍휼로 사랑의 편애를 극복한 사람들만 상대를 온전하게 밖에서도 보고, 안에서도 보고, 위에서도 보고, 아래에서도 보고, 좌에서도 보고 우에서도 본다. 온전한 모습을 본 것을 모아 상대를 전체적이고 맥락적으로 이해한다. 편견을 가졌다는 것은 상대와 자신이 가진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과 대상에 대한 사랑의 편애에 깊이 빠졌다는 의미다. 편견이란 제 눈의 안경으로 상대를 본 것이다. 자신이 가진 장점조차 가지지 못한 상대의 약점만을 집중적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예수, 석가, 공자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긍휼, 자비, 측은지심이었다. 긍휼, 자비, 측은지심은 모두 Compassion의 같은 번역이다. 유전자 복권에 대한 지독한 편애로 성인아이까지 만들어 자기학대에 나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고통을 보지 못하면 상대는 투명인간으로 전락한다.

긍휼의 공동체 아바타 인디언 족처럼 우리도 최소한의 긍휼을 복원해 사람들을 볼 때 "당신이 보입니다(당신을 당신으로 온전하게 사랑합니다)"로 인사할 수 있는 날을 소원해본다.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저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

I Saw You!!!

오늘은 당신이 또렷하게 보입니다!!!

I See You!!!

내일도 당신을 온전하게 보겠습니다!!

I Will See You, Tomorrow!!!

당신이 보입니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사다. 긍휼의 사랑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인사이자 자신이 세상을 나안으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졌다는 스스로에 대한 찬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