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스 룰은 얼핏보기에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남녀칠세 부동석과 비슷해보이는 측면이 있다.

미투운동이 번지자 우리나라에도 이 펜스 룰이 다시 기지게를 펴고 있다. 여성 부하나 동료에게 만나서 이야기할 중요한 내용도 만남을 자제하는 차원에서 카톡이나 이메일로 보낸다. 또한 반드시 필요한 해외출장에도 전문성이 있는 여성을 배제하고 남자 직원들끼리만 팀을 다시 편성해서 보낸다. 회식에서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고 여성직원들을 배제하는 일도 늘고 있다. 소통이 생명인 조직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일에 관한 소통도 갑자기 단절되기 시작했다.

회사가 다시 남녀칠세 부동석을 중시하는 조선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남성들이 파워를 쥐고 있으므로 이와 같은 펜스 룰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펜스 룰은 남성들이 여성동료와 접촉해야 한다는 이유로 경쟁하는 것을 회피함으로 여성들이 경력을 개척해 유리천장을 뚫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는 룰로 작용할 수 있다. 뛰어난 남성 상사가 뛰어난 여성부하에 대해 맨토링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수도 있다. 이대로 둔다면 미투 핑게를 대가며 여성직장인을 영원히 마이너리티로 고착화 시킬 수도 있다. 미투운동이 성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것인데 오히려 고도의 성차별을 정당화시키는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제대로 된 조직에서 직위란 남성 여성을 떠나 조직의 사명을 달성하는데 기여하는 바대로 공정하게 평가해서 부여하는 것이다. 사명에 여성이 더 기여를 할 수 있으면 여성에게 지위를 인정해주고 남성이 기여를 많이하면 남성에게 지위를 주는 것이다. 문제는 불분명한 사명이다. 사명이 분명하지 않는 조직에 항상 연줄과 정치가 판을 치는 이유는 누가 더 사명에 기여하는지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자신의 밥그릇을 챙기고 나름대로 조직의 질서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는 기왕이면 친한 사람, 과거에 성공한 경력이 있는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 등등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룰이 오히려 지배적 룰이 된다. 또한 사명이 불분명한 조직에서는 자신의 탐욕을 앞세울 수 있는 구멍들이 여기저기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탐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용인된다. 사명이 불분명한 조직에서는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전략적이고 스마트한 사람으로 칭송되고 높은 직책에 오른다. 사명이 불분명한 조직은 한 마디로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사명과 사명에 기여하는 기회, 과정, 결과가 공정성한 조직에서 남성이 자신의 지위를 고양하기 위해 여성을 물건이나 성적 도구로 취급할 수는 없다. 사명이 분명하다면 누구든 자신과 같은 고통과 열망을 가진 독립적인 사람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사명이 분명한 조직에서만 공정성이 담보되고 여성도 남성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사람으로 취급된다. 역지사지로 여성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가진 인간으로만 볼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들이 일으날 수는 없다. 역지사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을 둘러볼 수 있는 자존감의 거울이 깨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명의 상실에서 초래한 병이다.

미국에서 펜스 룰이 그래도 작동되는 이유는 정치가들이 나름대로 사명을 잃지 않고 사명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자신의 천직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들에게서 사명과 목적을 찾기 힘든 대한민국에서 펜스 룰은 여성에 대한 교묘한 역차별을 정당화하는 룰로 전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