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뮤엘 베케트의 희곡 <행복한 날들>엔 50대인 아내 위니와 60대인 남편 윌리가 나온다. 1막에서 위니는 허리까지 모래 속에 파뭍혀 있고 2막에서는 목까지 묻혀있다. 위니의 운명은 결국 모래 속에 파뭍혀 생명을 마감할 운명이다. 극 간간히 남편이 왔다 갔다 하지만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다. 모래 속에 파뭍혀 죽어가는 와중에도 위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을 한다. 주인공 위니는 하루종일 의미 없는 대사를 쏟아 놓는다. 모래는 그녀가 평생을 통해 축적해놓은 재산과 욕망의 상징이다.
경영학자들의 삶아 죽는 개구리 실험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한다. 개구리는 변온동물이어서 누구보다 변화를 잘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갇혀 살고 있다. 이런 개구리를 잡아다 냄비 속에 집어 넣고 서서히 온도를 가해본다. 서서히 온도를 가하면 개구리는 자신이 적응했다는 믿음에 갇혀서 결국 온도가 비등점에 오를 때까지도 끓는 냄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는다.
행복한 날들에서 위니는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술을 외운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 될거예요. 오늘은 행복했어요. 죽는 순간까지 그녀는 주술처럼 자신에게 오늘도 행복했어요 하고 외치지만 그녀에게 행복은 신기루이다.
둘의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일상에서 매일 직면하고 있는 죽음의 덫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수 있을까? 진정한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외니나 개구리의 문제는 자신의 믿음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외니는 돈이나 명예 등을 축적하면 삶은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에 갇혀살고 있고, 개구리는 자신이 충분히 변화에 적응했다는 믿음에 갇혀 살고 있다. 좋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게 하는 통찰력을 주기도 하지만 이 믿음을 세상이 변화에 적응시키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작용한다. 믿음의 감옥에 갇히는 순간 좋은 믿음도 우리를 가두는 감옥으로 변한다. 믿음의 감옥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심리적으로 죽음을 당한 좀비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제 집회현장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촛불, 태극기, 누가 믿음에 갇힌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 교회에 출석한 많은 교인 중 믿음에 갇히지 않고 신앙생활하는 교인들은 얼마나 될까?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 깨어나신 이유도 죽은 믿음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믿음에 갇힌 삶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단단한 알 속에 갇힌 좀비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알 속에서 머무는 한 우리의 행복은 여전히 신기루 속을 헤메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