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2-18 09:39
[N.Learning] 백범 김구의 진성리더십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5,351  

백범 김구

사실 사회적 토양이 진성리더십에 우호적이지 않아서 밝혀지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진성리더십을 실천한 진주 같은 숨은 리더들이 많이 존재해왔을 것이다. 긍정적 일탈자로써 진성리더들은 유사리더들이 진짜 리더인양 판을 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발굴되거나 조명되지 못해왔을 뿐이다. 본 저자는 일례로 김구선생을 꼽고 싶다. 평소에 김구선생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이에 대해 심경을 토로해가면서 한 김구선생의 독백은 진성리더의 면모를 잘 드러내준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면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선생이 대한민국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대한국민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존엄성을 찾아주자는 진북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면 아마도 두 번째쯤의 질문에 가서는 자신의 숨은 심경을 고백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해가면서 정치적으로 숨은 속내를 내 비쳤을 것이다. 진북에 대한 믿음이 강했기 때문에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김구선생은 대한민국의 독립만 될 수 있다면 독립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문지기를 자처하였다. 이와 같은 희생적 행동에 대한 몰입은 김구선생에게 대한민국의 독립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이 아님을 명명백백하게 전달해 준다. 진북 즉, 사명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는 급진주의자로 사명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작은 것에서 할 수 있는 것에서 가진 것에서 거북이의 자세로 임하는 급진적 거북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김구선생님은 대한국민들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큰 사명을 품기 전까지는 미천한 존재였다. 몰락양반 집안의 장남이었던 김구는 청년시절 양반들에게 모독을 당하는 일이 잦아지자 자신도 양반이 되기 위해 과거에 응시한다, 그러나 대리시험과 매관매직에 파행적으로 흐르는 과거시험 현장을 목격하고 시험을 포기한다. 그 후 세상을 바꾸는 혁명인 동학에 가담하여 접주로 활동한다. 동학시절 이름을 김창암(金昌巖)에서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하였다. 동학이 패퇴하여 도피하던 중 명성황후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국모를 시해한 빌미를 들어 일본인 첩자를 시해하게 된다. 이 죄로 인천감옥에 사형수로 갇히게 되지만 사형집행 하루전날 이 소문을 전해들은 고종이 전화를 걸어 형 집행이 보류된다. 인천감옥에서 간수들의 도움으로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인천 감옥에서 탈출한 후 공주의 마곡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1900년 지인을 찾아 강화도에 내려갔다 기독교로 개종하고 교육 계몽운동에 몰입하게 된다. 이후 을사조약을 무효화하는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다가 1911년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다시 구금된다.

서대문 형무소 시절인 1912년에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이름을 김창수에서 김구로 재개명하고 호를 백범이라 정하였다. "구(龜)를 구(九)로 고친 것은 왜의 호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요,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했다. 1915년 8월 가출옥한 후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소작인들을 계몽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농민계몽을 벌이다가 1918년 상해로 망명한다. 안창호의 도움으로 망명정부의 경무국장을 지내다가 1940년 임시정부의 주석에 취임한다.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후원을 받아 임시정부 최초의 정식군대인 대한민국 광복군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선다.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대한민국을 나눠서 통치하려는 주장인 신탁통치에 반대하다가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서울의 자택인 경교장에서 찬탁세력의 하수인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의 총격으로 암살당하였다. 항년 79세의 나이이다.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라는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김구선생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자기규제의 삶을 살았다. 대한민국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정신모형을 설정하고 리더의 길을 선택한 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김창수에서 백범 김구로 개명하였다. 호 백범은 백정들과 같은 범부들에게도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정신모형을 심어주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 대한독립이라는 정신모형을 구현하기 위한 백범의 모험적 실험과 희생적 실천은 누가보기에도 측은할 정도였다. 자기규제에 따른 진성리더로써의 삶을 실천하는데 모범을 보였다. 또한 대한제국의 문지기를 자처할 정도로 정신모형을 구현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겸손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진성리더에게 보이는 관계적 진실성의 소치이다. 진성리더십에 목말라 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김구선생님은 찾아서 배워야 할 숨어 있는 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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