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세 분의 하나님
어떤 사람이 진국인지 연기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판단은 상황이 좋을 때는 불가능하다. 상황이 어려웠졌을 때가 이 사람이 진국인지 아닌지를 검증해볼 수 있는 결정적 시기이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로 세상이 점점 어려워지니 기독교에도 이단과 정통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기준은 하나다. 지옥과 말세를 강조해가며 상황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마치 보험 판매원처럼 신앙의 보험을 팔아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집단은 이단일 것이다. 영생교, JMS, 신천지, 다미선교회같은 이단은 세상이 어려워졌을 때 등장했다. 상황이 어려워 영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 이들에 접근해 어렵게 땀흘리지 않고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비법이 있는 것처럼 복권사기를 시도했다. 이들은 신도가 되어 티켓을 구입하면 영생에 대한 수고없이도 100% 당첨이 되는 영생복권을 팔았다.
이단과 달리 정통교단이란 점점 불확실해지는 상황이 도래할 때 이 속에서도 신도들이 의미 있는 새로운 질서를 스스로 찾고 이를 통해 삶을 자기 조직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통 교단이라함은 신도가 믿음의 밥을 받아먹는 어린이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경고하고 이들이 스스로의 신앙으로 일어서는 어른의 근육을 갖게 돕는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의 의미도 새로운 질서를 위해 중세 기득권에 빠진 종교에 이의를 제기하는(Protest)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중세교회가 절대순종을 강요하며 교인을 신앙의 어린이로 만들어 교회에 점점 종속되게 만들었던 우를 21세기 교회에서 반복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이들은 신자들에게 돌아갈 믿음을 횡령했거나 하나님을 사칭한 배임행위를 한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이 심각해지면 사람들이 희망의 실타래로 갈구하는 것이 기적이다. 암울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가장 손쉽게 쓸 수 있는 방법인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과연 간절히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날까? 기적에 대한 해석은 사실 이단과 정통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서 누구도 쉽게 단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Little_Boy 라는 영화에는 정통 기독교인들이 기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8살 짜리 소년이다. 또래에 비해 키가 작아 놀림감이 되고 있는 주인공은 믿음이 좋은 소년이다. 2차 세계 대전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평발인 형 대신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나자 아버지를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기적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를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전쟁이 빨리 끝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전쟁이 빨리 끝나게 하는 기적을 간구하다가 뭐든지 간절하게 바라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신앙 사기꾼의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한다. 소년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 또래 아이들이나 어른들은 단순히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놀리자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부님을 찾아가 고충을 털어 놓는다.
이때 이 신부님은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이뤄지는 기적 원리를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적을 보여줄테니 아이에게 테이블에 있는 물병을 옮기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보라고 주문한다. 아이가 이 말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자 신부님은 기다렸다가 자신이 물병을 옮겨 놓는다. 아이가 신부님이 물병을 옮기는 것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하자 신부님이 기적의 원리를 설명한다. 기적은 자신 혼자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기도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한 사람들이 집단적 행동을 일으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가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신부님이 스스로 물병을 옮겨 놨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세상사에 기적으로 개입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개입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협업이라는 집단행동을 통해서 만드는 것이고 여기서 얻어진 기적의 결과는 이런 행동을 촉발하신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예수도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기적으로 세상 일에 개입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말씀 중 가장 혼동하고 있는 부분이 일인칭 믿음과 삼인칭 믿음의 부분이다.
열두 해 동안 하혈이 멈추지 않았던 여인을 고쳐주시며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 예리코에서 눈 먼 이에게 빛을 되찾아주셨을 때도(마가 10,52), 갈릴래아 인근에서 나병 환자를 낫게 한 뒤에도 (루카 17,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포한다.
예수는 예수자신의 권능에 대한 믿음, 즉 삼인칭 믿음이 여인과 맹인과 나병환자를 고친것이 아니라 "너 자신"에 대한 "너의" 믿음 즉 일인칭 믿음이 너희를 고쳤다고 선포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는 분이 아니고 개입은 당사자가 그 믿음을 일인칭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일으켜 세웠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했다. 예수가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강요하는 바리세인들의 삼인칭 믿음을 해체하고 기적은 오직 자신의 일인칭 믿음으로 스스로가 행동으로 개입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기도로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아직도 "내 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해 있다는 것"에 대한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들이 선포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삼인칭 믿음으로 이들을 고쳤다고 설교한다. 이들의 삼인칭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행위는 정통과 이단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삼인칭 믿음만을 강조하는 교회는 순종을 앞세워 신자들을 믿음을 항상 떠 먹여주어야 하는 신앙의 어린이로 고착화시킨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일인칭 깨달음을 얻어서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 행동으로 개입하고 이 개입을 통해 얻어진 기적과 같은 결과를 하나님의 의지가 관철된 것의 증거로 영광을 돌리는 겸양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독교의 본질이다.
성경에는 세 분의 하나님이 등장한다.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하나님(God), 창세기 2장에서부터 등장해 구약의 내러티브를 이끄는 야훼 하나님(The Lord God),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실 때 사용하는 신약의 나의 하나님(My God)이다. 구약의 야훼(여호아) 하나님 속에는 유대인들의 자신들의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님의 모습이 뒤섞여 있어서 구약을 읽을 때는 성경 문자 그대로 읽기보다는 제대로된 하나님을 분리해낼 수 있는 신앙적 문해력이 요구된다. 야훼 하나님이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God, 예수가 믿는 My God과 다른 점은 전쟁이나 기근이나 풍년 등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세상일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신의 개입을 통해 전쟁에서 이기고 자신들 부족의 영광을 드높히는데 사용했던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코로나로 경기가 어려워지고 실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요즈음 한국 기독교가 다시 개입하는 하나님을 불러들이는 기복적인 요소로 많이 흐르고 있다. 실제로 기도제목의 내용들도 자신과 자신 가족만을 위한 기복적 기도가 늘고 있다. 물론 이런 기복적 기도도 전혀 안 하는 사람들보다는 일어날 확율이 높겠지만 실제로 이런 기도 응답을 받은 사건들을 조사를 해보면 일반 확률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종교의 책무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플랫폼을 제공해 이 플랫폼 안에서 진정성이 있는 존재이유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서로를 독려해서 선하고 의로움에 대한 집단적 울림을 만들어내도록 돕는 것이다. 집단적 울림을 줄 수 없다면 세상이 바뀌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의 단초를 위한 깨우침은 신이 주지만 기적이 실행되는 것은 나에게 임한 성령이 나의 몸과 마음과 행동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때 즉 나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