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위기가 상수인 초뷰카(HyperVUCA)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막 여행과 비슷하다. 사막에서 하룻밤만 지내고 나면 사막을 여행하기 위해 가지고 갔던 지도와 모든 준비물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밤이 되면 모래바람이 불어와 사막의 지형을 바꾸어 놓기 때문에 공들여 그렸던 지도가 무용지물이 된다. 지도가 없으니 보였던 세상이 사라지고 모두가 맨붕에 빠진다.
초뷰카
세상의 본질은 <길 잃음>이다. 모두가 길을 잃었음에도 자신만은 길을 잃지 않았다고 주장해가며 숨기고 살 뿐이지 길잃은 삶에 대한 불안은 초뷰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 기업, 리더의 현실이다. 길잃은 상황에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 느끼는 상태가 현기증과 아노미(Anomie)다. 현기증은 자신이 본 세상과 실제로 돌아가는 세상이 다름에도 자기가 본 세상을 믿고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었을 때 허공을 헤매며 넘어질 때 경험한다. 자신이 본 세상이 실제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지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아노미에 시달린다.
아노미가 심각해지면 사는 것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줄을 놓는다. 소위 말하는 아노미 자살이다. 아노미 자살은 삶의 근력이 떨어진 노인들이나 청소년들을 제일 먼저 강타하지만 길을 잃고 헤매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의 그림자다. 근력과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좀 늦게 찾아올 뿐이다. 초뷰카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오아시스를 보고 달려가지만 가보면 신기루다. 점점 기력을 상실하고 결국은 하루 하루 아노미 자살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든다.
초뷰카 세상을 직면한 사람들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지고 코끼리라고 판단하는 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것은 정신모형이라는 자신이 암묵적으로 그려낸 지도를 통해서다. 암묵적 지도를 그릴 때는 지도가 작동되는 느낌이 있으나 세상은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려낸 지도가 현실을 잡아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암묵적 정신모형 지도가 세상을 읽지 못함에도 지도를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성공 경험으로 그려낸 정신모형 지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지도를 결사적으로 지키는 노력이 확증편향이다. 이렇게 지켜낸 지도를 만능 지도로 믿어가며 믿음의 감옥 속에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장님들 앞에 나타난 코끼리다. 우리가 가진 암묵적 지도로 세상을 볼 때 우리 모두는 코끼리 앞에 선 장님이다.
세상을 보는 지도인 암묵적 지도 때문에 우리가 보고 이해하는 세상이 코끼리 앞에선 장님일 수밖에 없는 우리 현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코끼리 전체를 볼 수 있는 통전적 비전을 획득할 수 있을까?
자신이 암묵적으로 그려낸 정신모형이라는 색안경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 안경을 벗고 지적 겸허함을 가지고 세상을 보려는 노력이 통전적 비전을 획득하는 첫 걸음이다. 이런 지적 겸허함을 토대로 다른 사람들이 본 세상에 대한 정보를 퍼즐로 맞춰가며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을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명시적 정신모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자신이 그려낸 암묵적 정신모형의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보려는 노력은 현상학에서 괄호치기(Bracketing)이라는 개념으로 연구되어왔다. 괄호치기는 대상을 볼 때 자신의 눈, 코, 입, 피부로 들어오는 제한적 경험 자료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포기하고 이런 자료를 대상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한 초기값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상의 앞면에서 시공간에 제한된 자료에 근거해서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판단을 유보하고 상대의 옆면, 뒷면, 위면, 아랫면에서 본 자료를 수집한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도 자신의 암묵적 정신모형이라는 프래임에 의해 가공되는 과정에서 오염되기 때문에 암묵적 정신모형의 가정이 내리는 판단에 판단을 중지하고 판단한다.
현상학을 응용한 해석학이나 민속학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간주간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정신모형의 협업을 제안한다. 간주간성이란 장님이 되어 코끼리를 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코끼리를 탐색한 장님들이 모여서 본인이 본 것들을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본 경험적 데이터 아래에 있는 진짜 코끼리 모습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사회과학의 진리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각가의 정신모형이 협업해서 찾아낸 간주간적 진실일 뿐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본 것을 중 공동의 진실을 담고 있는 평균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간주간성은 각자가 가지고 온 정신모형의 고유 오류 변량을 캔슬아웃 시켜서 숨겨진 진실에 접근하게 만든다.
얼마 전에 과학자들은 간주간성의 원리를 이용해 아인쉬타인이 처음 개념화한 이래 이론 속에만 존재하던 불랙홀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8개의 전파 망원경을 가상으로 연결해 지구 전체에서 우주를 관측할 수 있는 가상 망원경을 만들었다. 8개의 전파망원경 각자는 블랙홀을 보는 장님의 눈이었지만 지적 겸손함을 가지고 각자 자리에서 본 장님들의 8개의 눈을 엮어서 간주간성이라는 협업의 눈을 만들었을 때 블랙홀을 본 것이다.
블랙홀은 지구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먼 미래이다. 관측한 블랙홀은 5500만 광년 거리에 있는 처녀자리 블랙홀이다. 지구에서 이 블랙홀까지 가려면 5500만년이라는 먼 미래를 거쳐야 도달한다. 이렇게 먼 5500만년이 걸리는 미래를 가보지도 않고도 절대적 지적 겸허함을 유지해가며 각자의 정신모형이 본 세상에 대한 협업을 통해 본 것이다. 각자의 정신모형의 눈으로는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5500만 년의 먼 미래를 볼 수 있었던 비밀은 각자 정신모형의 겸허함을 인정하고 만들어낸 간주간성이라는 협업의 눈이 만든 기적이다.
자신이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정신모형이 코끼리 세상을 보는 장님의 색안경이었다는 지적 겸허함을 받아들이는 사람만 코끼리 세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통전적 비전을 획득한다. 비전은 자신의 암묵적 정신모형의 감옥에서 볼 때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보는 눈이다. 자신의 정신모형에 대한 지적 겸허함을 가지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남들이 본 것들의 퍼즐을 엮어낼 수 있는 사람들만 비전을 획득한다.
신은 지적으로 겸손한 사람에게만 선택적으로 세상의 진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