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대화운동의 창시자 개신교 원로 강원용 목사 (서울=연합뉴스: 2006년 8월 17일)
개신교계의 원로인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경동교회 명예목사가 17일 낮 12시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강 목사는 11일 오전 병원에서 쓰러져 중환자실로 옮겨진 뒤 그동안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해왔다.
강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포럼 관계자에 따르면 강 목사는 최근 극심한 무더위로 기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10일 강남삼성의료원에 요양차 입원했다가 이튿날 오전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졌다.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출생한 고인은 개신교 내 진보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출신으로 1931년 기독교에 입교한 뒤 평생을 한국교회 발전과 사회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인물이다.
일본 명치학원(東京明治學院) 영문학부를 졸업한 뒤 한신대와 미국 뉴욕유니언신학대에서 학사학위를, 1962년 캐나다 매니토바대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한신대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9년. 그때부터 경동교회에서 40여 년간 목회활동을 이끌며 오늘날의 경동교회를 만들었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산파역을 하며 총무와 이사장으로 일했고 1963년에는 '크리스챤 아카데미'(대화문화아카데미 전신)를 세워 종교 간 대화와 토론 문화 향상에 이바지했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재야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교유하며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해 온 그는 지난 2000년 남한의 국론통일과 주변 강대국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평화통일을 앞당기겠다는 취지로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방송위원회 위원장,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정치 사회 종교 언론 등 분야를 막론하고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새시대의 건설자', '폐허에의 호소', '자유케 하는 진리', '인생과 종교', '강원용과의 대화', '여해 강원용 전집', '믿는나와 믿음없는 나', '빈들에서', '역사의 언덕에서' 등의 저서를 남겼고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동백장, 체육훈장 청룡장, 니와노(庭野) 평화상, 만해상(평화부문)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기독교 장로회여신도회 전 회장인 부인 김명주(88) 씨를 비롯해 장녀 혜자, 차녀 혜원, 장남 대인, 사위로 김광국, 김정석, 자부 한진이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 병원 영안실 1호실, 장지는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남한강 공원묘원.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지며 영결예배가 21일 오전 10시 경동교회에서 진행된다. 영결예배 때는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로 조사를 낭독할 예정이다.
저서로 보는 강원용 목사의 삶 [서울연합: 2006년 8월 17일] 역사 속에서 화해 실천한 진보적 원로
"나는 독선적이고 폐쇄적으로 대립하는 역사 속에서 양극을 넘어선 제3지대에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중간, 그것을 넘어서'(Between and Beyond) 살고자 했던 나는 항상 양극 사이에서 좁고 험한 길을 걸어왔다. 나를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중간파, 때로는 회색분자 취급도 받았다. 그러나 어느 편은 절대 선이고 그 반대편은 절대 악이란 사고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보았기에 이를 해소하고자 1959년부터 크리스챤 아카데미 운동을 시작하면서 '대화'로 각 방면의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의 길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17일 타계한 개신교의 대표적 지도자인 강원용 목사가 2003년 펴낸 자서전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ㆍ전 5권)에 쓴 글이다. 종교 간 대화와 토론 문화 향상에 힘쓰고 사회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고인의 삶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엑소더스', '전쟁의 땅 혁명의 땅', 'Between and Beyond', '미완성의 민주화', '비스가 봉우리에서'라는 5개 소주제로 나눠 출간된 책에는 '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듯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했던 고인의 삶이 나타나있다.
강 목사는 서문에서 '대화와 협력'을 강조했다.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든 항상 자기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신앙 속에는 알게 모르게 과오가 있고, 나와 대립되는 믿음을 갖고 있거나 다른 종교를 가진 다른 집단 속에서도 나의 편견만 버리면 이해할 수 있는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열린 사랑, 열린 사상, 열린 종교로 대화하고 협력해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나는 비판과 박해까지 받았다."
향년 89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1993년 자서전 '빈들에서-나의 삶, 한국현대사의 소용돌이'(열린문화ㆍ전 3권)를 펴냈다.
"사람들이 내게 '당신은 누구요, 종교인이요?' 하고 물을때, 나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사회개혁가요?' '아니오' '그러면 정치가요?' '아니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한국이란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요'라고 한다."
그는 책에서 한국이라는 빈 들에서 자신이 한 일은 유한한 판단력으로나마 가급적 정직하게
고발하고 증언하고 충고하고 위로, 격려하는 일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빈 들은 성서에도 나오듯 '돌로 떡을 만들라'는 물질만능, 경제제일주의, 악마에 절하고라도 권력만 잡으면 된다는 권력숭배사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기복종교(祈福宗敎)에 의해 지배되는 공간이었다."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4대가 함께 사는 한국 농촌의 전형적 대가족 생활을 한 그는 어머니의 시집살이에 대해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억압 아래 고달픔과 고초의 연속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그는 사회운동을 통해 국내 여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강 목사의 팔순을 맞아 그와 인연을 맺은 각계 여성 지도자 39명이 1998년에 펴낸 '강원용과의 만남 그리고 여성운동'(여성신문사)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강 목사를 회고한 여성 지도자들은 강 목사가 여성도 남성과 평등한 위치에서 인간화되기를 바란,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요소가 없는 보기 드문 남성이었다고 전했다.
당시 한국여성개발원장이었던 박인덕씨는 강 목사가 "여성이 해방되지 않으면 남성도 해방될 수 없다", "여자를 구속하는 것은 곧 남자를 구속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며 그가 남녀차별은 비인간적 발상에서 비롯된 매우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강 목사는 남성이면서 어떤 진보적 여성보다 여성 해방적 관점을 가졌고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젊은 여성을 위한 중간집단 교육' 강연에 참가한 당당하고 멋진 페미니스트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수많은 여성들이 한국 여성문제의 해결 방안을 이때 함께 논의했다.
강 목사는 1974년 기독교 장로교 총회에서 '여목사 제도' 통과에 결정적 도움을 줬다. 여자 목사를 제도화하는 것은 목사 자격에 '사람'이란 단어 속에 남자와 여자가 포함돼 있음을 재확인하기로 가결한다는 것이 당시 통과된 조문이었다.
그는 '빈들에서'의 맺는 말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적었다.
"죽음이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래왔듯 나날이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고자 했다. 나는 한국의 빈 들에서 악의 영과 싸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는 몰라도 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죽음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다."
강원용 목사와 종교간 대화운동 [연합] 1963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설립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목사의 생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종교간 대화운동이다.
개신교 내 진보교단인 기독교장로회 출신인 고인은 1963년 대화문화아카데미(구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세워 교단 간 벽을 허물고, 종교 간에 대화의 통로는 여는 데 앞장섰다.
고인은 평소 "토론은 내 이야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대화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내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 알았던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종교간 대화운동은 '하나님은 기독교를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왔다', '교회가 아니라 세계가 하느님 활동의 장(場)'이라는 그의 신학이 행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고인이 이끈 대화문화아카데미는 1965년 10월 '한국 제 종교의 공동 과제'라는 주제로 종교간 대화 모임을 가졌다.
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 6대 종교 지도자들이 한데 모여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시도한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1960년대 한국 기독교의 핵심 과제는 이웃 종교인의 개종을 포함한 민족 복음화였다. 고인이 제시한 '선교가 아니라 대화'라는 신학의 틀은 근본주의적 신앙이 자리잡고 있던 국내 개신교 풍토 속에서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대화문화아카데미의 종교간 대화운동은 이후로 40년이 넘게 계속됐고, 수많은 대화모임과 연구모임, 종교간 대화교육모임이 열렸다.
나아가 1970년 일본 교토에서 세계종교인평화회의가 구성되고, 1976년에는 싱가포르에서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가 구성되는 등 세계적으로도 종교간 대화운동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고인은 1986년 아카데미 일에 전념하겠다며 자신이 창립해 40여 년간 시무해온 서울 경동교회의 당회장직에서도 조기 은퇴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펴다 출교 처분을 당한 변선환(작고) 박사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을 지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저술 활동을 통해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온 길희성 서강대 교수 등이 고인으로부터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강 목사는 한 시대의 큰 별이자 큰 스승` [연합] 강원용 목사 타계에 각계인사들 애도
17일 낮 12시께 노환으로 타계한 개신교계 원로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경동교회 명예목사에 대해 각계 인사들이 즉각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먼저 강 목사의 임종을 지켜본 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는 "한 시대가 간 것같다",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매주 교회에 오셨고 또 가끔은 설교도 해주실 만큼 정정하셨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박 목사는 "전체 기독교계 입장에서 보면 큰 별이 진 것"이라며 "강 목사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이제는 공동체적 리더십으로 계속 받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은 "강 목사님은 우리 사회의 어려운 고비마다 큰 빛을 보여주셨다"면서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신 강원용 목사님의 소천을 진심으로 애도한다", "목사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복을 누리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에 앞서 오전 11시께 강 목사가 입원해 있는 강남삼성의료원 중환자실을 직접 방문해 기도했다.
불교계도 즉각 애도의 뜻을 표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종교 간 화합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강원룡 목사님의 타계를 애도한다"며 "사회민주화에 끼친 고인의 남다른 정의심과 열정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이루는 밀알이 되고 종교 간 화합이나 분단된 민족 갈등을 통합하는 데에 있어서 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고 추모했다.
전 종계종 총무원장 송월주 스님도 "거의 30년 동안 깊은 인연을 가지고 제가 존경하던 목사님이었다"면서 "기독교 지도자일 뿐 아니라 민중과 민족지도자로서 목회활동을 이끌며 종교 간, 도농 간, 노사 간, 종파 간 대화를 이끌온 분"이라고 평했다.
또 "남북문제에 있어서도 전쟁이 아닌 대화와 평화적 방법에 의해 평화통일 기반을 조성하려고 노력해온 민족의 스승"이라며 명복을 빌었다.
강 목사와 4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왔다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강 목사님과 이런 저런 연고를 맺고 있는 사람은 전직 대통령들을 포함해 그야말로 수천 명일 것"이라며 "어떤 의미에서 그냥 한 사람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한 시대가 마감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근래 몸이 많이 쇠약해진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입원한 것은 몰랐었다"면서 "불과 한달 전만 해도 대화아카데미 토론회에서 뵜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연극인 박정자씨는 "무용, 연극 등 문화예술계와 두루 친분이 깊었던 고인은 윤석화 씨 등 아끼는 이들의 공연은 빼놓지 않고 보러 가는 열성팬이었다"며 "항상 열려있는 종교인으로 한 쪽에선 비난도 받으셨지만, 문화예술인 입장에서는 그 점이 오히려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도 "목사님은 남성이면서도 이 시대 여성문제에 선구자적 식견과 여성관을 갖고 여성교육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고 이끌어준 스승이었다"며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준 분이 돌아가셨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 강원용 목사 약력
다음은 17일 타계한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경동교회 명예목사의 약력이다.
▲1917년 =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출생 ▲1931년 = 기독교 입교, 차호공립보통학교 졸업 ▲1940년 = 일본 도쿄메이지학원 영문학부 졸업 ▲1948년 = 한신대 졸업(학사) ▲1956년 = 미국 뉴욕유니언신학대 졸업(학사) ▲1962년 = 캐나다 매니토바대 졸업(신학박사) ▲1994년 =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5년 =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49년 = 경동교회에서 목회활동 시작 ▲1961년 =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ㆍ중앙위원 ▲1963년 = 크리스챤아카데미(現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 ▲1986년 =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 ▲1994년 =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1986년 =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 ▲1987년 =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1988년 = 방송위원회 위원장 ▲1998년 =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1998년 = 2002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자문위원 ▲1994년 = 원광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5년 = 이화여자대학교 명예문학박사 ▲1949년 = 경동교회에서 목회활동 시작 ▲1961년 =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ㆍ중앙위원 ▲1963년 = 크리스챤아카데미(現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 ▲1986년 =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 ▲1994년 =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1986년 =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 ▲1987년 =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1988년 = 방송위원회 위원장 ▲1998년 =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1998년 = 2002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자문위원 ▲1998년 =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1998년 =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2000년 =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2000년 = (사)평화포럼 이사장 ▲2004년 = (재)실업극복 국민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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