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2-28 13:04
[N.Learning] 김지하의 예감
 글쓴이 : 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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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의 예감

‘바람 구두를 신은 사내’로 불리며 떠돌이로 살았던 시인 랭보는 “시인이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미래를 맑은 눈으로 보는 견자(見者)”라고 했다. 저항 시인에서 생명과 평화 사상가로 거듭난 김지하 시인은 요즘 “이 작은 한반도에서 동양과 서양의 창조적 결합을 통한 새로운 문명의 꽃을 예감한다”고 말한다. 지난 10년 동안 일본 중국 베트남 중앙아시아 유럽 미국을 떠돌아다닌 끝에 그는 견자의 입장에서 한국과 아시아 르네상스의 도래를 예견한다. 그 르네상스의 추동력은 한류(韓流) 열풍이다.

‘붉은 악마의 고정연호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한민국’의 ‘3박 플러스 2박’ 즉 ‘역동 플러스 안정’을 한류의 상징으로 내세운 김지하의 ‘한류’론은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무대 진출이란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신화적, 종교적, 미학적 상상력의 총체를 담은 신문명운동의 세계화를 지향한다.

▲ 고대 아시아와 아메리카 문명이 만나 7000개의 신화를 빚은 캄차카 반도를 찾아 문명의 시원을 탐구한 김지하 시인. /조선일보 DB

너무 거대한 꿈이라는 것을 김지하 시인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제정신 나간 ‘도라이’는 아니다”고 한다. “오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인으로서 새 문명을 예감한다”고 한 그는 “그 새로운 문명의 꽃을 ‘한’이라 부르고 싶다”며 이 책을 썼다. ‘한’은 韓과 恨 어느 한쪽으로 축소될 수 없고, 그 모두를 아우르고, 뛰어넘는 문명의 시원이다.

시인은 조선일보에 ‘문명의 시원을 찾아서’를 연재하면서 찾아간 중앙아시아 대초원의 푸른 하늘에서 ‘한’의 얼굴을 봤다. 그는 카자흐 민속대학의 민속학연구소장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카자흐에서 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이다.” “그 뜻은?” “영원한 푸른 하늘이다.” “알타이어로는 무엇인가?” “후에 문헤 탱그리다.” “그것은 중앙아시아와 아시아 전역에서 일률적인가?” “바로 그렇다. 거의 아시아 공통이다.”

시인은 여행을 통해 ‘한’의 뿌리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성장과 복지를 조화시킬 정치 경제적 중도(中道) 노선의 원형을 발견하기도 했다. 사마르칸트 시내의 사원 앞 시장에서 ‘여긴 신성과/ 욕망이/ 엇섞이는 사마르칸트’라고 읊은 시인은 신화 속의 신성한 시장(神市)의 향취를 느꼈다. ‘시장 경제의 교환 가치를 인정하면서 평등과 복지를 위한 호혜의 가치를 살리는 상생의 길이 고대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혼돈에 처한 인류 문명의 활로는 신시(神市)의 부활에 있고, 한류는 그 신화에서 발원한 ‘한’의 정신을 되살리고 동서양 문명을 결합하는 문화운동으로 거듭나기 위해 미국 문화와 만나야 한다. 미국을 두번 다녀온 시인은 “미국은 쉽게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대혼돈에 대응할 새로운 콘텐트가 없다”며 “아시아를 압축한 한국의 새로운 콘텐트와 유럽·미국의 소프트 및 하드웨어를 결합하여 미국의 전지구적 동력을 타고 전 인류문명사를 전환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하는 한류가 실천해야 할 민족미학을 ‘흰 그늘’이라고 부른다. 명창을 향해 ‘저 사람 소리에는 그늘이 있다’고 할 때 그 그늘이다. 그런데 ‘흰 그늘’이란 모순어법은 좀 복잡하다. 한(恨)을 삭이면서 신바람을 통해 밝은 삶의 지평을 열어가고, 어둠과 밝음을 통합하는 ‘숭고’의 미학이기 때문이다.

  •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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