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기업의 다양성 및 포용(Diversity & Inclusion) 담당자들의 세미나를 진행해가며 마무리 결론으로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조언을 소개했다.

"강자가 자신의 가면을 내려놓고 약자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것이 조직 정치(다양성)의 본질이다"

한나 아렌트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조직이 지속가능성을 위해 도입해야 할 다양성은 그냥 조직 정치가들의 말 잔치로 끝날 개연성이 높다. 100년이 흘러도 기업에서 다양성 문제는 근원적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한다. 직장 내 여성과 남성의 형평과 불평등 문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가면을 진실을 감추고 자신의 숨은 의도를 연기하는 소품으로 생각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가면의 역기능적 측면 이면에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가면의 긍정적 측면도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가면은 의도를 실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누구나 사회적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가면은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가면 밑에 의도의 진실성이 가면의 가치를 결정한다.

판소리 굿 판이나 오페라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은 진실의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쓴 가면이다. 이들이 가면을 쓰지 않는 한 서로가 현실에서는 만나는 일이 없다. 서로에게 자신의 진실한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아렌트에게 가면은 진실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소통의 수단이다. 아렌트에게 가면을 쓰는 것은 진실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의 순수한 정치 행위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강자라도 자신의 가면을 내려놓고 약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들의 가면을 대신 써주고 이들과 연대가 가능하다. 가면을 대신 써주는 행위가 정치다.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잊혀진 약자들이다. 이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자신의 목소리만으로 승부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진실의 도구가 가면이다. 이들에게 가면이라는 도구가 없었다면 많은 청중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복면가왕은 이들 잊혀진 약자들이 자신의 가면을 벗고 새로운 가면을 다시 쓰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돕는 소품이다. 사회생활을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밖에 나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상적 가면행위다.

현 정부는 젊은 여성과 남성을 갈라 치기 해서 여성의 가면을 벗겨버리고 남성의 가면을 억지로 씌우는 장면을 연출해 젊은 남성들의 표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런 갈라치기 전략으로 약자가 쓴 가면 벗기기에 성공해 근소한 표차이로 집권했다. 지금도 여가부라는 여성의 가면을 벗겨내고 짝퉁 여성을 장관으로 동원해 자신들의 가면을 대신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다. 요즈음 관공서에 가서 여성이나 소수의 이야기를 꺼내면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이들 갈라치기 정치꾼들에게 자신들의 가면을 내려놓고 약자의 가면을 대신 써보는 연대의 정치행위를 기대하는 것은 100년이 지나야 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대한민국에서는 강자가 약자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정치가 실종되었다.

정치인들이 약자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연기는 정치 현장이 아니라 선거 때 전통시장에서 국밥을 먹는 모습으로 밀려났다. 누가 정말로 서민과 같이 눈물의 국밥을 먹는 사람인지 누가 국밥을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악어 눈물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아렌트가 열망하는 연대는 사라지고 갈라치기 하는 정치인들이 다시 승승장구할 것이다.

특히 국회의원은 자신 강자의 가면을 내려놓고 약자의 가면을 국회라는 공적 장소에서 대신 써주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최소한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런 약자의 가면을 대신 써주는 척하는 가짜 연기에 두 번 속는 국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번 선거에도 이런 가짜 가면을 쓴 악어 정치인들로부터 진실을 위해 싸우는 진정성이 있는 정치인들을 분별해 내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의 정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