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 CEO의 사례들
누가 뭐래도 세기적 진성리더는 얼마 전 별세한 Steve Jobs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브 잡스의 정신모형은 2005년 6월 12일 스텐포드 대학의 졸업식 연설문에 그대로 잘 드러나 있다. 2011년 10월 5일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스티브 잡스의 생은 세상에 신성한 족적을 남기기 위한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북극성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이어지는 점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자신만의 사명이 명료하게 존재하고 이에 대한 투철한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정신모형의 구성요소 중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명 혹은 미션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세상은 온통 혼동으로 가득 차있다. 이 혼돈 속에서 길을 잃어버려도 다시 길을 찾게 해주는 북극성이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명이 없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묘사해보라면 모든 것이 우연이다. 사명이 뚜렷한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자기의 삶은 그렇게 살도록 운명 지워진 것 같다는 말을 자주한다. 단련된 정신모형이 마음의 근육이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탄생하자마자 부유한 변호사 집안에 입양되기로 했다가 변호사 집안에서 여아를 바란다는 이유로 입양되지 못하고 건설노동자인 양부모에게 생모가 대학교육을 시켜준다는 각서를 받고 입양이 결정되는 과정은 차라리 운명의 장난보다 더 한 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스티브 잡스의 생은 자신만의 정신모형에 의해서 통제된 삶이었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어떤 미래의 기점을 중심으로 점들이 존재하고 이 점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묘사한 점은 자신의 북극성이 되어준 정신모형에 대한 단단한 믿음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정신모형을 찾기 위해 일정 기간 방황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74년 인도에서 요가와 불교에 빠져 지내던 7개월 동안 만들어진 심플하고 단순한 정신모형은 애플의 모든 디자인에 그대로 드러난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서있을 때 자기 자신을 가장 진솔하게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췌장암 수술을 앞두고도 죽음 앞에서 정신모형을 가다듬어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다. 췌장암 수술 이후 스티브 잡스는 33년 간 거울을 보며 죽음 앞에서 있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가면 자신을 성찰해왔다고 회고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몇 번의 인생의 시련을 겪는다. 스티브 잡스는 이 시련을 자신의 정신모형을 검증하는 기회로 이용한다. 정신모형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단단한 마음의 근육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건설노동자인 부모가 학비를 댈 수 없어서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을 때도 친구의 기숙사 방에 빌붙어 살면서 나중 맥켄토시 컴퓨터에 장착될 서체공부에 빠진다. 주은 캔을 바꾸어서 식비를 마련하는 고단한 삶도 미래의 컴퓨터에 대한 꿈을 담은 강렬한 스티브 잡스의 정신모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자신이 영입한 애플의 CEO에 의해서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서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을 때도 Pixar를 세워 애니메이션을 통한 자신의 정신모형을 구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련을 통해 자신의 정신모형을 단련하고 검증한 기간을 보냈다고 볼 수 있다.
스티브 잡스의 정신모형은 스탠포드 연설문 중 스튜어트 브랜드의 지구여행백과 마지막문장에서 인용한 “Stay Hungry, Stay Foolish" 말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Stay Hungry는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담은 정신모형 2와 지금까지 삶을 이끌어 주었던 현재의 정신모형 1과의 갭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배고픈 상태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삶을 살라는 언명이다. Stay Foolish는 이와 같은 정신모형을 구축했다면 이 정신모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이를 단련시켜 단단한 근육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남들이 아무리 좋은 말로 더 좋은 길에 대해서 fancy talk로 유혹해도 이 fancy talk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정신모형에 대한 믿음을 지키라는 뜻이다. 자신의 정신모형을 지키는 행동에 대해서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자신의 정신모형이 추구하는 길에 집중하고 이를 현실로 구현하여 이를 통해서 이들에게 자신의 정신모형을 추구한 길이 옭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정신모형으로 단련된 믿음을 통해서 세상에 신성한 족적을 많이 남겼다. 세상의 최초의 컴퓨터라고 볼 수 있는 맥켄토시를 만들었고, 아이튠즈, 앱스토어, 아이폰 등 세상의 지형을 바꿔놓은 창의적 제품들을 내어 놓았다. 이와 같은 작품들은 스티브 잡스의 창의적이고 비전 지향적 정신모형이 애플로 전수되어 애플의 정신모형으로 확장 정렬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정신모형에 대한 기반이 없이 제품에만 몰입했다면 세상을 바꾸는 신성한 족적은 한두 가지의 제품으로 국한되어 세상에서 쉽게 잊혀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진성리더의 믿음으로 단련된 정신모형은 이와 같은 창의적 제품들의 태반역할을 수행해왔던 것이다.
진성리더의 중요한 특성인 관계적 진실성은 스티브 잡스를 완벽한 진성리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가장 큰 장애다. 사후 출간된 자서전에 의하면 자신의 생부와 생모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잡스는 양부모를 일컬어 "1000% 내 부모"라 했지만 생부와 생모에 대해선 "나의 정자와 난자은행일 뿐"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매킨토시 출시 이후 직원 4분의 1을 해고하면서 "너희들은 B급"이라 했고, 납품사가 일정을 못 맞추자 "빌어먹을 고자 녀석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애플 공장을 방문한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부인이 컴퓨터 대신 직원 복지와 근로조건을 계속 묻자 그는 말했다. 그렇게 복지에 관심이 많으면 직접 와서 일하라고 해라고 중얼거렸고 통역자는 "영부인께서 방문해주셔서 고맙다"라고 거짓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애플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는 "잡스는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상처를 입히는 방법을 잘 알고 그것을 실천했다"고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속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혹은 "필터가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스티브 잡스에게는 사람들을 존경받아야 할 존재론적 대상이 아니라 천재 아니면 바보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이와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에 대해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의 정신모형을 통해 스티브 잡스 아니면 보여줄 수 없었던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Starbucks의 창업자 Howard Schultz는 스티브 잡스만큼 세상에 큰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관계적 진정성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진성 CEO이다. 하워드 슐츠의 정신모형은 어렸을 때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경험한 가난에서 비롯된다.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서 몇 개의 파트타임을 뛰며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폐암으로 사망한다. 어렸을 적 하워드 슐츠는 아머지의 무능에 대해서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제록스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고 이후에는 가정용품을 생산하는 Hemmarplast의 부회장자리에 까지 오른다. 그러던 어느 날 스타벅스 에스프레소 맛에 반해서 대기업 부회장 자리를 박차고 그 당시 4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던 스타벅스의 마케팅 책임자로 합류한다. 이때 슐츠는 각성적 사건을 경험한다. 어느 날 슐츠는 얼굴이 익은 단골손님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그 단골손님은 울먹이면서 자기는 직장으로부터 해고당해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어서 매일 매장을 찾는 것이라며 하소연하듯 고백한다. 슐츠는 그 중년 남성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 사회적으로 부적응자로 증오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된다.
이때부터 회사의 비전을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회사에서 영혼이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으로 전환한다. 정신모형의 비전의 요소보다는 목적과 사명의 요소를 강화시킨 회사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다. 아버지처럼 사회적으로 홀대받는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고용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회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다른 대기업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최소 20시간의 정규취업기회를 부여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적 진실성 구축을 중시하는 회사에 대한 정신모형의 뼈대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사원들을 종업원이 아닌 파트너로 생각하거나, 배우자에게도 보험혜택을 부여하는 등 사원의 복지에 충실한 하거나, 지역사회에 최대한의 기여를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나, 커피 생산농가에게 적정가격을 지불하는 회사라는 정신모형을 실현시킨다. 회사는 일을 하는 개념을 넘어서서 즐기면서 생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결심이 결실을 보자 슐츠는 주식을 종업원들에게 나눠준다. 또한 스타벅스를 집, 직장을 벗어나 사람들이 만나고 일하고 인터넷을 즐길 수 있고 독서를 할 수 있는 제 삼의 사회적 문화공간으로 탄생시킨다. 스타벅스가 단순히 커피만을 팔았다면 지금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이다. 커피를 매개로 해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회와의 연결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보았고 가정이나 직장에서 느끼지 못한 또 다른 사회적 공간으로써 제공되는 매력을 덧붙였다. 스타벅스가 다른 기업에 비해 연봉수준은 낮지만 직원들의 로열티만큼은 어떤 기업보다 높은 이유는 슐츠의 정신모형의 진정성을 종업원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슐츠이외에도 미국 비즈니스 세계에서 진성리더로 거론되는 CEO들은 GE의 Jeff Immelt, IBM의 Sam Palmisano, Xerox의 Anne Mulcahy, P&G의 AG Lafley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각자가 서로 다른 스타일을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이 이끄는 회사는 어떤 다른 회사보다도 명료한 정신모형을 가지고 있고 회사의 사명을 중시한다. 또한 이들의 정신모형은 종업원들의 정신모형으로 내재화 되어 조직의 북극성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북극성을 향한 행진은 정렬되어 있고 일관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회사들의 제도나 관행들은 이 북극성에서 요구하는 목적이나 비전과 통합되어 있어서 고객들은 이 회사를 성품이 있는 회사로 지지한다.
한국의 경우는 유한양행의 창립자 유일한 박사를 진성리더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난 1971년 4월 8일 당시 시가로 36억2000만원에 해당하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돼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유일한(柳一韓) 박사 그가 남긴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시대적 정신모형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남겼다.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마련해 준다.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ㆍ고등학교 안에 있는 땅 5000 평을 물려준다. 이 땅을 유한 동산으로 꾸며 주기 바란다.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라. 나머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신탁 기금에 보내, 뜻 있는 교육 사업과 사회사업에 쓰도록 하라!’
유일한 박사는 이 편지를 남긴 채 일흔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학생들이 뛰노는 ‘유한동산’에 잠들었다. 대재벌이었던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그리고 손때 묻은 가방ㆍ안경ㆍ만년필ㆍ지팡이가 전부였습니다. 유일한 박사가 죽은 뒤 20 년이 흐른 1991년 어느 날, 딸 유재라 여사는 200억 원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낌없이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하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만약 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국가, 교육, 기업, 가정 순이라고 믿었던 유일한 박사가 자신의 정신적 이념을 실천한 것이다.
유일한 박사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柳一馨). 동학혁명, 갑오경장, 청일전쟁 등으로 나라 안팎이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있었던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친 유기연(柳基淵)과 모친 김기복씨의 9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일한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9살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일한의 아버지는 서구문물의 강대함을 어린 유일한이 보고 배워서 조선을 강하게 키우라는 뜻으로 초등학생을 혼자 유학 보낸 것이다. 요즈음 말하는 조기유학과는 거리가 먼 정말 나라를 구하는 큰 인물로 키우기 위해서 유학을 보낸 것이다. 장남을 어린 나이에 연고지 없는 외국으로 보낸 부친의 결단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의 커니라는 조그마한 동네에 도착한 유일한은 침례교 신자인 독신녀 자매의 가정에서 기식하며 고달픈 고학의 길에 접어든다. 유일한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박용만이 세운 헤스팅즈 소년병 학교를 거쳐 네브라스카 고교에 다닌다. 원래 유일한(一韓)의 이름은 유일형(一馨)이었다. 중학교때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이 일형을 임의로 일환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다. 일형보다는 한국의 '한(韓)'자가 들어간 이름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한 일한은 북간도에 계신 아버지께 전후사정을 말씀드리고, 일한으로 이름을 바꾸는 문제를 상의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아버지에게서 답장이 왔다. "네 생각이 정히 그렇다면 바꾸도록 해라. 그리고 네 동생들의 돌림자도 한(韓)으로 하겠다."
고등학교를 미식축구 장학금으로 마치고 미시간대학에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4학년이었던 1919년(24세)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하여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기초한다. 이것을 계기로 재미한인사회의 지도급 인사였던 서재필, 이승만 등과 만나게 된다. 당시 재미한인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로는 안창호, 서재필, 이승만, 박용만 등이 있었고, 이들은 제각기 독립운동의 방법을 놓고 입장 차이를 보였다. 유일한 박사는 서재필과는 두터운 교분을 맺은 반면 이승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동포들이 걷어준 운동자금을 사사로운 데 사용하고, 독립운동의 열정보다는 정치가로서의 야심이 많았던 이승만의 행보에 적잖이 실망한 것이다. 8·15 광복 직전 미국 전략정보국(OSS)이 한국인들로 구성된 특수공작조를 한국에 침투시켜 지하조직을 결성, 무장 항일운동을 벌이게 하려던 '냅코 NAPKO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잠시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에 다니다 곧 뉴욕에 있는 GE에서 회계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 곳에서 일하는 동양인이라고는 혼자 밖에 없었다. 능력을 인정받아 1년 남짓 지났을 때 동영지사 책임자로 내정되는 등 출세가도가 눈앞에 펼쳐질 무렵 돌연 회사를 그만 두었다. '이 곳에 계속 있으면 나야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지만, 고국의 동포들을 놔두고 나 혼자 호의호식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디트로이트에서 옮겨서 본격적인 장사에 몰입한다. 장사를 통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한 뒤 장차 한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1926년 미국에서 '유한주식회사'를 세웠다. 사장에 서재필, 부사장에 정한경이 취임했고, 그는 재무를 맡았다. 유한양행의 상표이자 신용의 상장이 된 '버들표'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 때다. 회사 상징 마크인 '버드나무'가 새겨진 조각은 서재필이 "뜨거운 여름날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 되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이는 또한 한국인임을 잊지 말고 모진 비바람에도 꿋꿋이 일어나는 버드나무와 같은 삶을 살아란 뜻도 담겨있었다. 서재필 박사의 말을 가슴깊이 새기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국민의 건강부터 챙겨야겠다는 비전을 세운다. 그의 나이 31살 때의 일이다.
첫 약품 광고 '금계납(金鷄納)'과 '장충산(腸蟲散)'에 대한 광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건 수개월 후인 1928년 7월 9일. 유한양행의 약품광고는 기존 제약회사들의 것과는 달랐다. 당시 약품 선전들은 대부분 어떠한 질환에 효능이 있는지에 대한 언급 없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이었는데 반해 유한양행은 구체적인 질환, 효능 등을 명시하고, 버들표 마크와 의사 호미리·약사 나찬수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제품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회사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방식이었다.
30년대 후반 유한양행의 사세가 확장일로에 있던 때였다. 만주와 국내의 시장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 간부가 유일한 사장에게 그 결과를 보고했다. "사장님, 지금 국내에도 마약중독자들이 날로 증가해 가는 추세라 헤로인, 모르핀 제제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을 제조 판매한다면……." "뭣이라고! …… 자네는 도대체 지금껏 유한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아니, 내가 지금껏 자네 그 머릿속에, 자네 그 가슴 속에 넣어준 것이 고작 그런 짓이나 생각하고 그런 말이나 하라는 것이었단 말인가? 고약한! 어서 썩 물러나게!" 다른 제약회사들이 이윤만을 생각해 앞 다퉈 마약 성분이 함유된 진통제 판매에 열을 올릴 때에도 유한양행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덜 남더라도 가정에서 필요한 상비약 생산·판매에 주력했다. 약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손실분 함량까지 고려해 생산하는 게 유한의 기업정신이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버들표만 찍혀 있으면 믿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30년대 후반 유한양행은 보관시설비가 엄청난 반면 수요가 매우 적어 그 누구도 취급하려 하지 않았던 긴급약품, 맹장염 혈청 '엔티겐그린'과 뇌척수막염 혈청 '엔티베닝고코스'의 보관시설을 갖추고, 전국 각지의 병원에서 요청하면 어느 때라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철도와 특별협약을 맺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일한 박사를 '자본주의의 논리보다 자본주의의 윤리에 철저했던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36년에 종업원 지주제를 통해 종업원들이 주인과 같은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지금에야 우리 사주제라는 제도가 있지만 1936년에 이런 제도를 생각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본고장 미국에서도 생각하기 힘든 제도였다. 한참 성장하고 있던 유한양행은 1962년도에 주식 상장 작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기업공개작업에 착수하고 있던 직원들은 회장이 제시한 액면가 100원은 너무 낮다고 말했다. 시장가치로 본다면 최소한 600~700원 정도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일한 회장은 주식을 상장하는 이유는 유한이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 것이기도 하기에 공개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액면가 100원을 그대로 밀어붙이라고 지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주가는 상장 후에 1,000원까지 올라간다.
한번은 광고탑을 세우기 위해 평당 30원에 사뒀던 서교동 땅이 도로가 건설되면서 천정부지로 가격이 뛰었다. 서울시에서 제2한강교 건립을 위해 평당 4,000원에 매입하겠다고 했으나 지주들은 평당 12,000원은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며 보상가격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유한양행의 직원들 역시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는 나라가 원한다면 당장 나라가 원하는 가격에 땅을 내놓아야 한다며 호통을 친다. 그 말을 듣고 유일한의 애국심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다른 지주들은 조금 더 높은 가격을 받기는 했으나 결국은 유한 때문에 적절한 가격 선에서 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유한에는 유일한의 친인척이 근무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한은 자신의 가족이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죽음을 앞두고 당신이 살아 있을 당시에 회사에 있던 친인척 모두를 내보냈다. 임원들은 비록 친인척이라고 하더라도 채용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무조건 해고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리기도 했다. 그러나 회사에 들어온 가족이나 친인척이 파벌을 형성하는 것을 두려워한 유일한은 1969년에 일체의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고 경영 일선을 떠난다. 회사는 창업주 가족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아 권력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유한양행은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수차례 세무사찰을 받았지만 탈세 사실이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세무사찰 후 담당기관으로부터 우량납세·모범업체로 선정돼 표창장까지 받은 일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일한 박사는 평생 정치 참여는 물론 그와 관련된 발언을 삼갔다. '정치는 정치가들이, 기업은 기업가들이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 그가 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이 유럽 순방에 오를 때 유한양행 본사(서울 대방동)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지지 의사를 나타낸 적이 있었다. 철저히 반(反) 이승만 입장이었던 그가 박정희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63년쯤일 겁니다. 유일한 회장님과 함께 일본 출장을 떠난 적이 있는데, 비행기 안에서 제게 묻더군요. '님자,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해.' '그래도 뭔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 같습니다.' '맞아, 나도 처음엔 박정희를 테러단 두목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래도 뭔가 하려는 것 같애.'" 유일한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정치적 색채나 개인 박정희가 아니라고 말한다. 몇 년이 흐른 뒤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 태세를 갖추자 유일한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 던졌다. "역시 배운 게 없어서 욕심이 많아……."
유일한 박사는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일방적으로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본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있도록 했다. 회사에서 사택을 지어주자 끝내 개인 주식 배당금에서 비용을 지불했고, 유한양행에서 만든 약조차 사서 먹었다.
이렇게 근검절약해서 모은 돈은 그는 "교육에 대한 투자는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며 꾸준히 교육 사업에 투자했다. 유일한박사는 기업가보다도 본인을 교육자로 불리는 것을 더 선호했다. 심지어 여권 직업난에도 교육자라고 써넣을 정도였다. 유일한 박사는 6·25전쟁 후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 개인 소유의 유한양행 주식 3할을 신탁재산으로 해 52년 12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했다. 학비는 물론 의식주까지 무료로 제공했다. 재단법인 유한학원이 세워진 건 그로부터 5년 후인 62년 10월 18일이다. 64년 3월에 한국고등기술학교(유한공고 전신)의 첫 신입생을 받았다. 유일한 박사는 학원설립 후 잠시 이사장을 맡았다가 평소 친분이 있던 김명선 박사(작고·전 연대 의대 교수)에게 물려주고 난 뒤 학교운영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유일한 박사와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오래 전부터 김 박사는 경제적인 도움을 줘야 할 학생들이 생길 때마다 유일한 박사에게 찾아가 '손을 내밀었고', 그 때마다 유일한 박사는 "또 강도 오셨구먼" 하며 두말없이 필요한 만큼의 돈을 내주었다.
유일한 박사의 교육관은 매우 독특했고, 그만큼 분명했다. 인재를 기른다거나 육영사업을 하면 보통 인문계열의 엘리트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그는 일관되게 직업기술교육을 선택했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무엇보다 기술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현장에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이 땅에 첫 육영사업으로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한 것이나 유한공고를 세운 것도 이 같은 교육관에 따른 것이었다. 이해득실을 놓고 보자면 사실 유한양행으로서는 구태여 공고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교육은 시기가 중요해. 돈을 벌어서 투자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때는 이미 늦어. 교육이란 필요한 때 제 때 투자해야 되거든.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인) 희생을 강요해선 안 돼." '모든 생명은 한 번 태어나지 두 번 태어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지금 당장'이라는 원칙 아래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임해야지.“ '기업이야 한 번 망해도 다시 일으키면 되지만 교육은 한 번 실패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기업경영 일선에 한 발 물러선, 말년에 접어든 유일한 박사의 낙은 유한양행이 한 눈에 내다보이는 사택의 창가에 서서 사색에 잠기는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유한학원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이런 말년의 뜻은 그의 유언장에 또 다른 한 줄로 표시되어 있다.
유한동산은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며 쉴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 연보 :::::
1895년 평양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1904년 10 세 때 홀로 미국으로 건너감
1919년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
1916년 미시간 주립 대학에 입학
1922년 라초이 주식회사 세움
1925년 21 년 만에 가족을 만남
1926년 호미리와 결혼 후 귀국해 유한양행 설립
1953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돌아옴
1964년 학교 법인 유한학원을 창설
1969년 전문 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줌
1971년 유한동산에 묻힘
한국에서 굴지의 재벌을 일군 사업가들이 많지만 이들을 진성리더라고 판단하기에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유일한 박사는 달랐다. 유일한 박사의 사명은 기업다운 기업을 일구어서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었다. 보통의 기업가들은 상상할 수 없는 스케일의 사명이다. 이런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적절한 사업영역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국민의 건강과 직결된 사업이었다. 이름에 오대양 육대주를 연상시키는 양행을 붙인 것도 이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글로벌 마인드의 표현이다. 한국을 넘어서 오대양 육대주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은 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서 유한양행은 미국의 킴벌리 글라크와 전략적 제휴를 하고 이름을 유한킴벌리로 바꾸게 되고 유한킴벌리는 킴벌리 클라크의 아시아 경영을 책임지는 회사로 성장한다. 유일한박사가 중요시 하던 가치는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이라고 정했다. Johnson & Johnson의 크레도를 고객, 직원, 공동체, 주주의 순으로 정해놓은 것과 비견되어진다. Johnson & Johnson이 1982년 타이네롤 사건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정신모형을 검증하여 윤리 및 신뢰 경영의 대명사가 된 것 훨씬 이전부터 유한양행의 CEO는 윤리경영과 신뢰경영을 실천하고 있었다.
진성리더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자신의 정신모형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정신모형을 확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에 몰입한다는 점이다. 유일한 박사는 어린아이로는 상상할 수 없을 나이인 9세에 이미 유학길에 올랐다. 미시간대학에서 경영학을 했고 1953년도에 프린스턴에서 국제법으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끝임 없이 학업에 몰입하였으며 학업의 중요성을 자신의 소중한 가치 중 두 번째의 순위에 놓을 정도였다. 교육 사업에 대한 애정은 바로 끊임없이 이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공부시키는 열정을 심어주었다. 기업의 이익에 따라서 맡았던 학교에서 언제든지 손을 떼는 현재의 대기업들이나 학교를 이윤추구의 도구로 삼고 있는 한국의 교육재벌재단 행태와는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교육에 임했다. 결국 유일한 박사의 정신모형은 지금의 유한킴벌리에 그대로 계승되어 이 회사를 품성이 있는 위대한 유산을 가진 회사로 자라나게 도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