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라는 희랍의 신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침대보다 길면 손발을 잘라냈다.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침대 크기에 맞추는 고통을 부과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편견과 혐오의 신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인 자신의 정신모형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프로크루테스의 환생이다. 다른 사람을 잡아다 편견과 고정관념과 혐오의 감옥에 가두고 자신 정신모형의 침대에 눕혀놓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정신모형을 포기할 때까지 고문을 감행한다.
국힘당의 혁신위원장 인요한에게 이준석이 보인 추태는 전형적으로 프로크루테스가 환생한 모습이었다. 가장 고단수의 혐오와 차별은 언어를 통한 차별이다. 자신도 익숙하지 못한 영어를 구사해가며 인요한이라는 한국이름이 버졌하게 있음에도 미스터 립튼으로 불러가며 인요한이 진골 성골 한국인인 자신과는 다른 한국인이라는 차별과 혐오를 남겼다. 인요한 위원장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나름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셨을 텐데 이런 이방인 취급은 정체성에 큰 상처를 준 것이다. 정체성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인요한 박사께 한국인 중에는 이준석과 다른 한국인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정중하게 설명드리고 싶다. 대신 사과하고 싶다.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라고는 눈을 부비고도 찾아볼 수 없다. 북미에서 이런 추태를 벌였다면 이준석은 곧장 정치생명에 사형선고를 당했을 것이다. 미국에 가서 배운 것이 다양성 인권이 아니라 영어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당 운운하지만 이준석의 한계는 여기까지로 보인다. 아직도 지난 대선에서도 청년과 장년, 여성과 남성을 정치공학적으로 갈라치기해 얻었던 성공경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혐오와 갈라치기 때문에 여성과 노인이 어떤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긍휼이 메마른 정치인이다. 자신이 보인 행태가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는 대통령과 무엇이 다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긍휼이 사라진 기성 정치에 젊은이가 오염되어 똑같이 퇴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같아서 안타깝다.
이번 총선에서는 당을 넘어 국가의 사명과 목적에 대한 헌신과 아픈 사람들의 가면을 대신 써줄 수 있는 긍휼감이 넘치는 정치가들이 많이 등용되었으면 한다. 젊은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이준석식 혐오정치로 정치공학적 계산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모두 퇴출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