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0-06 13:15
[N.Learning] 믿음이 강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글쓴이 : 윤정구
조회 : 1,481  
믿음이 강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주체의 부활
한국에서 미국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현대의 항공기술 수준을 볼 때 비행기를 타고 가는 도중 사고가 날 확률은 거의 없다. 비행기를 타야 미국에 제시간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다는 믿음은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의 객관적 믿음이다.
하지만 내가 실제 비행기를 탈 것인지 아닌 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삼인칭 믿음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주관적 일인칭 믿음이 나의 행동을 좌우한다. 나 자신은 비행기에 대한 드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고소공포증도 있고, 공황 장애 증세도 있을 경우 다른 모든 사람은 비행기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어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안전하게 미국에 도착할 수 있다는 일인칭 주체로서의 믿음이 없다. 삼인칭 믿음과 일인칭 믿음이 충돌한다면 미국에 가고 싶은 열망이 아무리 커도 이 열망을 실현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모든 사람이 믿는 삼인칭 믿음이 강해 이것이 단단한 현실로 다가온다 해도 이런 현실에 대한 나 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없다면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삼인칭 믿음은 인지적 환경인 반면, 일인칭 믿음은 내 몸을 움직여 진실을 행동으로 입증하게 만드는 신조다. 지행격차는 삼인칭 믿음은 충만하더라도 정작 나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이 부재할 때 생긴다. 내가 주인이자 주체로 부활할 수 있는 것은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될 때이다. 삼인칭 믿음은 대부분 과거와 현재 눈에 목격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지만 일인칭 믿음은 나를 통해 미래가 증거될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의 진실에 대한 믿음이다. 삼인칭 믿음에 비해 일인칭 믿음의 보이지 않는 속성 때문에 구축하기가 힘들다.
삼인칭 믿음은 우리에게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를 제공해 운신의 폭을 넓혀준다. 하지만 아무리 큰 운신의 폭을 가지고 있어도 내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인칭 믿음은 이런 심리적 안정의 울타리 안에서 나를 진실의 증거이자 주체로 일으켜 세우는 나 자신에 관한 믿음 문제다. 고유한 믿음을 씨앗으로 종묘해 나무를 길러내고 여기서 포도를 얻어내는 과정을 통해 내 몸, 내 마음, 내 정신으로 진실을 증거하겠다는 약속에 대한 믿음이 일인칭 믿음이다. 삼인칭 믿음은 건강한 삶의 울타리이자 필요조건이지만, 일인칭 믿음은 이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주인으로 일으켜 세워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무늬를 만들고 이 무늬를 통해 자신을 진실의 증거로 세우는 진리의 검증 과정이다. 객관적 현실을 알지만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행동의 결여는 삼인칭 믿음에 비해 일인칭 믿음이 없을 때이다.
일인칭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 주체적 삶의 중요성에 대해서 각성하고 스스로가 작가가 되어 자신 삶의 대본을 직접 쓴다. 일인칭 주체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자연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진리는 깨달을 수 있어도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자기 삶의 진실은 깨닫지 못한다. 삼인칭 믿음이 인지적 믿음이라면 일인칭 믿음은 믿음의 씨앗이 자신의 몸이라는 토양을 뚫고 자신을 통해 발현될 때만 진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류의 진보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 일인칭 믿음을 실현시킨 사람들이 주도해왔다. 일인칭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 진실이란 발견한 목적을 자신을 통해 현실에서 실현시킨 결과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일인칭 믿음이 이끄는 주체적 삶을 복원하는 것은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에 담겨 있는 복음의 말씀이 단순히 삼인칭 믿음에 멈춰 있다면 원칙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깐깐한 교장 선생님과 같은 유연성이 없는 성경주의자, 교회주의자, 율법주의자가 된다. 기독교인에게 일인칭 믿음이란 이 복음을 자신의 몸을 통과시켜 자신을 통해 복음이 새롭게 증거되는 부활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근력을 의미한다.
예수는 나병환자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가며 이런 기적은 너희들이 믿고 있듯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이 너를 통해 증거가 되는 너 자신에 대한 일인칭 믿음 때문에 스스로 일어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복음의 씨앗이 우리의 몸의 토양에 발아되어 나무로 탄생하여 결실을 만든 사건을 진실의 사건으로 생각했다.
예수께서 일인칭 믿음을 통해 만들어지는 길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에 이른다는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할 때 평소 눈에 보이는 것만 선택적으로 믿고 결과주의자이자 의구심이 강했던 도마가 질문한다. "주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길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요한복음 14장 6절)라고 답한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가 개척한 길만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설명은 삼인칭 믿음에 경도된 해석이다. 본인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알아도 하나님에 대한 삼인칭 믿음을 자신의 몸을 통한 일인칭 믿음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가르침으로 해석한다. 예수도 일인칭 믿음과 영을 담고 있는 자신의 몸(Me)를 통해 하나님에 이르는 진리의 길을 발견한 것과 같이 도마도 믿음을 자신의 몸에 성화시켜 하나님에 이르는 자신만의 진리의 길을 찾으라는 조언이다. 말씀을 품고 자신의 몸과 정신과 영혼을 동원해 하나님에 도달하는 길을 만들면 이 길을 만든 사람에게 길은 모두 진리의 길이다. 예수는 누구나 자신의 몸, 마음, 정신을 일으켜 세워 자신만의 고유한 진리의 길을 만들 수 있음을 가르쳤다. 예수는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하나가 아니라 사람들의 숫자 만큼 많을 수 있다는 진리의 민주화 선언이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삼인칭 믿음이 일인칭으로 전환되었을 때 기적(근원적 변화)이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가 구약의 유대교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일인칭 주체성에 대한 믿음과 철학이다. 기독교의 근원을 정초한 바울이 착안한 점도 이점이다. 바울은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가 전한 삼인칭 복음이 우리 삶과 우리 몸을 통해 일신우일신 일인칭으로 부활되는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때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종교로 정초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예수는 나병환자와 앉은뱅이도 일인칭 부활사건을 통해 자신과 하나님을 잇는 진리의 길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구약의 하나님과 달리 신약에서 해석된 하나님은 유대인의 영광을 위해 역사에 사사건건 진노해가며 개입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체성에 개입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스스로 설정한 울타리 밖에서 다양한 성령의 모습을 한 보혜사(변호사, 조력자, 상담사, 스승, 코치 등등)를 보내 갈구하는 신자들에게 조언과 격려와 상담을 할 뿐이다. 자신의 몸, 마음, 정신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은 인간의 고유권한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울타리 밖에서 조언하고 격려하는 보혜사의 도움에 따라 울타리 안의 심리적 안정공간에서 응원을 받아가며 행동하는 주체라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제공한 울타리에 대한 믿음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공포와 두려움을 밀어내 심리적 안정감을 선물한다. 모든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제공한 "울타리"에 대한 삼인칭 믿음에서다. 삼인칭 믿음으로 둘러진 울타리 안에서 자신에게 전달된 사랑과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를 통해 자신을 복음의 증거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일인칭 믿음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만든 울타리 안에 거하는 삼인칭 믿음은 믿음의 시작이다. 이 울타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내 몸의 씨앗으로 받아들여 열매를 길러내는 농부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을 내 속에 거하게 만드는 일인칭 믿음이 실현된다. 자신 속에 하나님을 거하게 만드는 일인칭 믿음을 실현해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세상을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무다.
21세기 교회가 정체된 이유 중 하나는 순종을 잘못 해석해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한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삼인칭 믿음으로 무장해 믿고 기도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일의 원인, 과정, 결과까지 모두 목적에 맞춰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잘못된 목적론이 기복론을 탄생시켰다. 삼인칭 믿음은 한 달란트를 한 달란트로 갚는 것을 정당하게 생각하는 성도를 키웠다. 한 달란트는 하나님이 제공해준 은혜의 땅이자 종자돈이라면 이 땅에서 종잣돈으로 자신의 나무를 키워 다섯 달란트를 만들어내는 일인칭 믿음을 완성한 사람들이 공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진정한 크리스챤이다. 자신은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서 은혜 받았음을 외쳐가며 열매를 수도 없이 따먹고 향락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열매의 씨앗을 자신에게 심어서 남들을 위한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일인칭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산다. 삼인칭 믿음만 존재하는 교회는 생명이 자라지 않는 죽은 교회다.
삼인칭 믿음을 넘어서서 일인칭 믿음을 세울 수 있을 때 진실이 탄생한다는 것을 설파한 대표적 현대철학자는 베르그송과 바디우다. 베르그송도 진실이란 오직 자신이 어떤 본질적 상태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규정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주체적 체험만이 진실을 씨앗을 담는다고 설명한다. 바디우는 자신의 몸의 지평을 뚫고 진실의 씨앗이 자신을 통해 발아되는 것을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진실은 오직 자신의 몸을 통한 주체적 사건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에는 삼인칭 믿음이 넘쳐나지만 자신을 주체이자 주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인칭 믿음은 점점 더 고갈되고 있다. 실제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내가 실제로 수행하는 대부분 역할들도 따지고 보면 다 삼인칭 문법이다. 부모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말했어, 친구가 그랬어, 어떤 위인전에도 나와 있어, 유명한 자기계발서에 나와 있어 등등 내가 수행하는 역할 중 삼인칭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나는 삼인칭인 그가 써논 내 역할에 대한 대본을 연기하는 연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다.
로고세라피(의미 치료법)를 정초한 빅터 프랭클도 자신이 나치 수용소의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수용소에 갇혀 죽을 운명이라는 냉혹한 삼인칭 현실에 대한 믿음이 삶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일인칭 주체에 대한 믿음의 울타리를 무너트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삼인칭 믿음이 주체적 일인칭 의미의 원천인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믿음이 강해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삼인칭 믿음은 나의 몸, 마음, 정신에 개입하는 일인칭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한다. 아무리 성경을 통채로 외우고 외운 성경 내용이 현실이라고 믿어도 이 믿음이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문법이 <삼인칭> 믿음에서 <일인칭>인 나 혹은 우리의 믿음으로 변주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주체적 삶은 가능하지 않다. 진정성은 내가 나의 삶에 대한 대본을 스스로 마련하고 이 이야기를 삼인칭에게 들려 줌으로 피드백과 지원을 받아서 실제로 나의 삶을 통해 내가 진실의 증거가 될 때 달성된다. 자아를 내적 자아와 외적 자아로 자아를 구분할 때 내적 자아는 스토리 작가이고 외적자아는 이 스토리의 대본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러이다. 이 스토리텔러의 올바른 역할은 내재적 자아가 쓴 나의 스토리를 전파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지원을 이끌어내고 그들로 부터 들은 내 스토리의 미진한 점에 대한 피드백을 내재적 자아에게 전달해주는 에이전시인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스토리는 대부분 3인칭 문법인 <그>로 채워져 있다. 그의 쓰나미에 사로잡혀 연기자로서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동안에 나를 통해 실현되는 진실은 하나도 없었다. 삼인칭 믿음은 아무리 강해도 토양에 불과한 믿음이다. 여기에 목적의 씨앗을 뿌려 살아 생장하는 일인칭 믿음을 부활시키지 못한다면 주체와 주인으로서의 삶은 물 건너간 것이다.
예수는 삼인칭 믿음의 감옥에 갇혀 살던 인간을 일인칭 믿음으로 해방시켜 인간을 삶의 일인칭 주체로 세운 주체 철학의 선구자다. 예수는 우리에게 이런 주체 철학을 기반으로 저승에서 누리는 천국만큼 이승에서 우리가 주체적으로 세우는 천국의 사명을 각성시켰다.

이름 패스워드 비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