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은 살아날 희망이 사라진 L자 불경기로 인한 죽음의 공포와 디지털 혁명이 과속화 되어 변화를 따라 잡을 수 없는 불안이 쌍두마차가 되어 비현실적 불확실성을 양산하는 초뷰카(Hyper VUCA)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의 실존적 현실은 답을 찾아 나서지만 쉽게 답이 보여지지 않고 헤매는 길잃음이다. 국가, 사회, 기업, 개인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음에도 자신이 지금까지 축적한 것을 포장해 길을 잃지 않았음을 연기할 뿐이다. 우리 모두의 현실은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이미 길을 잃었음이다.
우리 연구진(윤정구, Lawler, Thye)은 질서에 대해 일가견을 가진 세계를 대표하는 사회심리학자들과 협업해 개인과 조직과 사회가 끝없이 펼쳐지는 불확실성의 짙은 안개를 벗어나는 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무질서의 언저리에서 피어나는 질서 Order on the Edge of Chaos: Social Psychology and the Problem of Social Order(Cambrige University Press) 2015>라는 책을 출간했다. 의미 있는 질서에 대한 석학들의 제안에 담긴 공통점은 조직이나 사회의 존재목적을 찾아내 자신의 고유한 영토에서 자기 조직적으로 키워 내재적으로 확산하는 방식이다. 개인에게는 자신의 삶의 개입이 끝나는 지점에 존재하는 존재 목적을 찾아서 현재로 가져오고 존재목적을 밀알로 삼아서 자신의 삶의 고유한 밭에 씨앗으로 심고 씨앗을 발아시켜 과일나무의 과수원으로 길러내는 노력을 통해서다. 개인, 사회, 조직, 국가에 헌신하는 구성원은 이런 질서의 내생적 동학을 이용해 삶에 드리워진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의미 있는 질서가 자기조직적으로 피어나게 돕는다.
이런 질서의 내생적 자기조직화 과정을 방해하고 자신들도 의미 있는 질서의 처방을 내릴 수 있다고 사업하는 사람들이 무속이다. 무속은 나름대로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항상 부분 최적화 솔루션에 불과하다. 이런 무속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세상은 아노미 전쟁에 돌입한다. 무속은 불안을 이용한 장사다. 세상 무질서가 늘어날수록 그만큼 무속에 대한 소비도 늘어난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사이비가 갑자기 급증하는 원리다. 지금 한국사회가 그 모습이다.
무속이 비즈니스를 하는 전략은 우상화와 악마화이다. 무속은 궁극적 질서의 씨앗을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따라서 목적과 수단의 벨류체인 중 아주 낮은 부분을 절단해서 이것을 마치 궁극적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상화한다. 우상화의 방식은 사람들에게 눈으로 보여져야하기 때문에 물신화의 방식을 따른다. 이렇게 나름의 무속체계를 만들면 이 범주에 들어와 신봉하는 내집단 사람과 아직 신봉하지 않는 외집단 사람을 분류하고 이 분류를 위해 외집단 중 약한 고리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악마화 한다. 점쟁이들은 악마화된 대상을 상징하는 허수아비(Strawman)를 만들어 놓고 비밀회동을 통해 틈만 나면 칼로 찌르고 공격하도록 해가며 이 허구적 대상에 대한 증오심을 키운다. 악마화는 주술사들의 영업방식이다. 자신들도 악마화되어 공격당하기 싫으면 자신들에게 합류하라는 위협이다. 이 증오심을 이용해 모객행위도 하고 주술집단의 내부결속도 다진다.
우상화와 악마화가 우연한 기회에 정치적 권력과 결속하면 사회는 파국을 맞이한다. 우상화와 악마화는 어두운 정치가 돌아가는 동학이기도 하다. 정치가 파행으로 치닫는 지름길도 존재목적을 잃은 사람을 번지름한 겉만 보고 정치적으로 우상화해서 세우고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반대세력을 악마화해서 내집단의 결속을 강화한다. 실제 지금 대한민국을 흔들었던 계엄도 무속을 소비하던 리더가 자신을 왕으로 우상화하고 왕으로 우상화한 자신을 반대하는 집단을 몰아서 악마화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우상화와 악마화의 과정에서 지금 확인된 무속인 노상원 뿐 아니라 김건희와 연관된 다양한 무속인들의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한다.
얼마 전 기독교 사회문제 연구원이 발표한 2023년 <기독청년인식조사>에 따르면 19세에서 34세의 개신교 청년 중 점이나 타로 등 주술을 소비하는 비율이 45.4%다. 개신교가 지금 제공하는 신앙의 울타리가 무너져 청년들에게는 더 이상 울타리가 되고 있지 못함에 대한 경고다. 세상은 가속화되는 디지털 혁명으로 초개인화 되어가는데 개인들이 가진 아픔의 맥락을 고려하지 못한 맹목적인 순종에 대한 강요가 문제를 키우고 있다. 순종한다고 아픔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것도 아님을 체험한 청년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성경 말씀보다 구글, 유튜브, 타로, 무당이 제공하는 나름의 부적을 통해 문제를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성경 66권이 제공하는 하나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이 말씀은 모두가 나서서 변화한 세상의 맥락에 맞게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점점 산성화되어가는 현실 속에 말씀이 뿌리내리게 도와 주어야 한다. 기독교인에게 성경 말씀이 나침반이라면 나침반은 현재의 세상이 변화하면 바뀐 세상에 맞춰서 북극(하나님 말씀의 의미)을 찾도록 떨릴 수 있어야 살아 있는 나침반이다.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고 주술의 소비자로 전락한 이유는 어느 순간 이들 마음 속 나침반이 나침반으로 작동하는 떨림을 멈추고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와 교회는 어느 순간 죽어서 떨림을 멈춘 나침반으로 전락했다. 떨림을 멈춘 교회를 탈출한 사람들이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이 죽은 나침반을 살아 있는 나침반으로 주장하는 가짜 주술사들이 홍위병으로 세운 기독청년들과 함께 여의도파 광화문파로 나뉘어 우왕좌왕 거리를 헤매고 있다.
우리 모두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 떨리고 있는 나침반이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이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