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이건희 회장은 후꾸다고문의 보고서를 비롯해서 삼성의 각종 문제를 보고받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회장에 취임한지 6년 동안 그렇게 질경영을 호소했음에도 삼성은 전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수행비서진에게 도대체 삼성의 문제가 무엇이지 생각해보라고 화두를 던진다. 비서진이 전략적 분석기법을 동원해 답을 마련해가면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돌려보낸다. 이건희 회장에게는 이미 본인이 생각해놓은 답이 있었다는 소리다. 잠을 안 재워가며 답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돌려보내기를 반복하자 같이 있던 홍라희여사가 이러다 비서들 다 잡겠다고 성화를 보이자 이건희 회장은 마음에 담고 있던 답을 들려준다.
"삼성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있다. 회사를 설립한 이래 한 번도 적자를 보지 않았다. 큰 항공사도 하루아침에 날라가곤하는 항공업에서 설 립이래 적자를 보지 않았다는 것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서양의 경영의 신을 한 사람 꼽으라면 캘르허 회장을 꼽을 것이다. 이 회사는 911이 사태가 벌어져 모든 사람들이 비행기 타기를 꺼려할 때도 적자를 보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고객들은 항공업계가 어렵다는 소문을 듣자 이 회사에 아무 조건없이 천불 이천불의 수표를 끊어 보냈다. 사우스웨스트가 천명하는 가치가 사랑이다. 사랑은 회사의 로고로도 세겨져 있다. 이 회사의 상당 수 직원들은 회사의 사랑로고를 마음 속으로만 담고 다니기가 아까워 문신으로 세겨가지고 다녀가며 고객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닌다. 직원도 회사가 천명한 사랑을 마음으로 받이들일 뿐 아니라 평생 지울 수 없는 문신으로 까지 세겨서 자랑하고 다니니 이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대단하다. 이 회사는 특별히 직원을 관리하지 않는다. 관리하지 않음에도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남의 일을 도와서 완수하는 책임감과 협업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파일럿도 시간이 남으면 티켓 카운터에 와서 짐을 나르는 것을 돕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왜 이건희 회장은 삼성문제의 근원을 사랑의 부재에서 찾은 것일까?
철학적인 문제일수도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단순한 문제일수도 있다. 세상에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 사람은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 수 없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노예에게는 스스로 애착을 가질만한 주체적 삶이 없다. 노예는 주인삶의 종속물이자 주인의 성공과 부를 위한 수단이다. 노예로 산다는 것은 이런 자신의 종속적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노예에게 주인의식이 있을리 없다. 노예에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노예의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책임을 요구할 수 없으니 주인 스스로가 책임지지 위해서 동원한 수단이 관리이다. 관리의 삼성은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초일류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통해 극복해보고 싶어했던 골리앗이다.
이건희 회장이 병원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노예상태를 키우는 관리의 골리앗은 다시 옛날의 강건한 모습을 되찿아 가는 느낌이다. 삼성은 30년전 이건희 회장이 그리 극복하고 싶어했던 악령과 아직도 싸우고 있는셈이다. 이런 제도적 압력에 굴복해 삼성사람들도 은연중 노예상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자신과 삼성을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고객은 더욱 삼성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고 초인류삼성의 길은 더욱 요원한 길이 될 것이다. 종업원들도 자신의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 회사가 포장하고 사기치는 방법 말고 초일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삼성사람들 스스로가 삼성을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 회사로 삼성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내린 온갖 전략적 비즈니스 처방은 오히려 문제를 더 왜곡시킬 개연성이 높다.